Far from Heaven...


파 프롬 헤븐은 삶의 어떤 구멍, 함정, 결핍에 관한 영화다.


구멍이란, 함정이란, 결핍이란 누구든지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결함이다.


결함이라고 해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것이 결함을 가졌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편견에 의해 가치 판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결함이란 차이가 있다는 의미와 더불어 그것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결함이라는 단어의 우선적 의미는 차이가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차이이기 때문에 보통 명사로써 결함이 된다.


서로가 가진 차이는 서로를 인정할 때 부각된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줄 아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나인 것을 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사회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혹은 결함을 자신이 인정하지 못한다면 결함은 끝내 나를 잠식하게 된다.


나에게 구멍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구멍은 점점 커져


마침내는 나를 구멍에 빠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성적 취향을 결함으로 가지고 있다.


그는 오래전에 그것을 발견했지만 어디까지나 감추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1950년대 중반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동성애란 어느 정도 불가항력적임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동성애의 반수 이상은 전기충격이나 호르몬 요법 같은 물리적 방법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질병’이었다.


미국 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이성애와 다를 바 없다고 인정한 것이 1994년의 일이고,


그 이전까지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결함이었다.


프랭크 자신에 의해서도 결함은 메워질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을 은폐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자신의 결함을 발견한 후 그는 8년 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달려왔다.


되도록 결함이 무엇인지 잊고 살기 위해 더더욱 그는 고투해 왔다.


프랭크는 그런 방식으로 삶에 대해 투쟁한다면


감쪽같이 결함을 묻어 버리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결국 감추어진 결함은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다.


내 안의 구멍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수록 커지는 법이다.


아내 캐시에게 들켜버린 자신의 결함. 끝내 고개를 내밀고 인정해 달라고 소리치는 함정.


프랭크에게 이 순간은 절망적이면서 동시에 희망적이다.


결함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마찬가지로 아내와 아이들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는 일이 되고 만다.


프랭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결함을 감추고자 한다.


이미 환하게 드러나 버린 결함이건만 아내만 아는 비밀로 은폐를 다시 시도한다.


결함이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할 뿐이다.


결함의 사실을 알아도 그것을 은폐해야 할 목적이 일치하는 사람사이에서 그것은 숨겨질 수 있다.


은폐의 공범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드러나기 시작한 결함은 더 이상 자신 속에서 통제될 수 없다.


아내와의 공범적 공감을 통해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동성애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에 가까운 한 달 휴가를 받았을 때


프랭크는 비로소 자신의 결함은 스스로의 의지로 좌우될 수 없는 것임을 경험하게 된다.


캐시에게 고백하듯 그에게 ‘사랑이란 것이 이런 느낌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됐어.’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은폐될 수 없이 드러난 결함은 다만 차이로만 인정되지 않는다.


이제 보통명사로써 결함의 진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가치 판단된다.


그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한 쪽을 편들기 때문에 대중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사회에서 버림받게 되는 일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진실하다고,


이것이 참된 것이라고 느끼는 사랑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가 받아들여야 할 고통은 진실한 사랑과 함께 그에게 온 것이다.


앞으로 그가 감수해야 할 인생은 결함을 차이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와의 줄기찬 투쟁으로 범벅되어야 한다.


결함을 감추고 은폐할 때 그의 인생의 목표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결함이란 감출 수 없고 감추려 할수록 힘을 얻는 것이라 인정할 때


그의 목표는 진실한 사랑을 찾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물론 그것이 이전까지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어 왔던 책임을 송두리째 내팽개치는 일이 되겠지만,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것이 결함에 의해 자신이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캐시에게 결함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내는 모범이다.


성공한 남편을 만드는 지혜로운 양처이며,


그녀는 아들과 딸에게 늘 또박또박한 어조로 바른 생활을 가르치는 현모이다.


파티를 열고 스스로 파티의 주인공이 되는 사교계의 여왕이다.


그녀는 딸에게서는 자신이 커서 닮고 싶은 여자이고, 남편의 친구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미인으로 칭송되며,


그녀의 단짝 친구로부터 부러움을 산다.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그녀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며 살기에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의 결함이 드러나자마자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본래부터 캐시에게는 없었던 결함이 남편의 결함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결함을 감추어왔을 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캐시의 모습은 언제나 페르조나의 모습이다.


자신의 감정과 속마음은 늘 감추어져 있다.


여자 친구들과 만나 남편과의 성생활에 대해 농담할 때에 조차도 캐시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남편이 다른 남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고서도 그녀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녀가 마침내 울게 된 것은 남편이 어쩔 수 없는 선을 넘어선 다음이었다.


늘 주변의 사람들 속에서 페르조나만을 보여주는 그녀에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단짝 친구 엘리나에게 고백하듯


흑인 정원사 레이몬드와 이야기할 때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캐시가 레이몬드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잡지사에서는 행복한 가정,

아니 사회적인 부러움의 대상이 될만한 가정을 꾸려가는 캐시를 취재하러 왔을 때였다.

프랭크는 자신의 결함이 무엇인지 일찍 알았던 반면 캐시는 그렇지 못했다.

결함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녀는 행복했다.

그러나 레이몬드가 등장했을 때, 그리고 그와 대화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결함을 발견한다.

그녀의 결함은 바로 소통하지 못함에 있었다.

그녀는 셀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사교계의 여왕으로 칭송되지만

정작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레이몬드는 전단지의 광고처럼 ‘다른 사랑’이 아니라 소통의 관계였다.

남편에게서, 단짝 친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소통의 감정들을 흑인에게서 느꼈을 때,

그것은 그녀를 압도하는 사회적 결함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서로 다른 피부색이 캐시의 결함을 은폐하도록 강요했다.

그녀가 발견한 유일한 소통의 관계였지만, 그녀는 백인이고 그는 흑인이므로 인정될 수 없다.

그녀가 레이몬드와 함께 트럭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고,

그 소문을 전해들은 남편이 술에 취한 채 회사에서 달려왔을 때 그녀는 절망했다.

애초부터 남편과의 관계는 소통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다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목표였을 뿐이었다.

자신이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음을, 또는 극대화된 페르조나 속에서

자신은 은폐되어 있다는 것조차 행복한 가정이라는 목표 때문에 감추어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소통의 관계가 다가왔을 때 남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프랭크의 결함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캐시에게 프랭크의 이러한 반응은 배신과 같은 것이었다.

하긴 둘은 처음부터 소통하지 못했으니

서로를 향해 쓴 가면이 드러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캐시도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결함과 타협하기 위해 애를 쓴다.

남편과 설전 끝에 레이몬드를 이미 해고했다고 말하고서,

그녀는 레이몬드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고하지만,

프랭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소통의 관계를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캐시는 조금더 용감했어야 했다. 좀더 자신감을 가졌어야 했다.

남편과 이혼한 다음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가 아니라

프랭크처럼 결함을 결함으로 인정하고 사회와 맞서 싸울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소통의 관계인 레이몬드를 뒷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찾았어야 했다.

먼 훗날 레이몬드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과 유일한 소통의 통로를 잃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소통 없는 삶이 그녀를 질식하게 만들어왔는데,

그녀는 다시 그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려는 것일까?

캐시의 삶에 대한 자신 없음, 혹은 투쟁성의 결여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흑인에 대한 차별에 관해 레이몬드와 이야기하면서

캐시는 다음 세대에는 그런 차별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감독은 레이몬드의 딸이 백인 아이들에게 테러 당하는 것을 보여 주면서

투쟁이 없이 바램을 갖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캐시는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몬드와의 관계 역시 그녀는 사회의 비난과 손가락질 때문에 스스로 포기해야 했다.

삶은 이 세상과의 끊임없는 투쟁일 수밖에 없음을,

미래에 어떤 낙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망각한 캐시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프랭크와 캐시는 자신의 결함이 사회적으로 드러났을 때 그것에 서로 다르게 대처했다.

프랭크는 행복을 찾아갔지만 무책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캐시는 책임을 감당하려 했지만,

그 대가로 유일한 소통의 관계를 포기해야 했다. 과연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국에서 가까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결함이 더 이상 감추어져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있는 결함은 서로를 사랑하며, 이해하며, 차이를 드러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럴 때에만 드러나고, 인정되며, 받아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