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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해당되는 글 1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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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the 영구, by the 영구, for the 영구...

영구의 변함 없는 모습.
다만 나이가 먹은 모습.
변화가 없다는 것만으로 캐릭터가 만들어지진 않을 것이다.
일관된 스타일이 세월의 흐름 속에 잘 녹아나지 못하면 구태의연함이 될 수도 있다.

영구는 언젠가 훌쩍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보여준다.
뭔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자신을 믿고 있고,
어리숙함이 역사를 바꿀지도 모른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너무나 큰 부담이다.
언젠가는 그냥 떠나고 싶은 압박감을 영화 속에서 느낀다.

다시 한번 어떤 말로도 이 영화를 표현 못하겠다.
이 말 말고는...
영구의, 영구에 의한, 영구를 위한 영화 라스트갓파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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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11. 1. 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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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젤워싱턴이 주연한 영화..
수백년 동안 인종차별이 지속되어왔고 그것때문에 전쟁ㄲㅏ지 치룬 나라.
이념적으로 대립된지 1백년에 전쟁을 치룬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치열한데..... 미국에서 흑백 갈등은 더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 않겠지.
리메버 타이탄은 그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느 날 졸지에 통합하게 된 흑백 고등학교의 럭비팀.
독재 리더십으로 하나를 만들어가는 분 코치.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살벌하지만 영화는 그 분위기를진솔하게보여준다.
지금 잘 하 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더욱어렵다..
흑백으로 나뉜 팀을 하나로 만들고
주변의 도전들을 이겨나가는 것이 어찌 쉬울까?
백인 코치 요스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것도포기해야하구.
어떻든 비열한 방법으로라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력은 헛된일인데..
게리가 교통사고로 입원해서 흑인 동료 줄리어스가 문병왔을 때
가족말고 면회가 안된다는 간호사에게 "우린 닮았어요. 형제라구요!"
말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요스트 코치의 딸 쉐릴
9.5 살이라는데 대단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신들의 편견에 맞선 타이탄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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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10. 12. 2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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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을 만지던 느낌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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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10. 10. 26.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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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꼭 영화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 영화 재미있습니다.
극 전개도 탄탄하고, 반전도 극적이고, 마무리도 깔끔합니다.
굳이 흠 잡을만한 한 두 장면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완성도 높습니다.
물론 시원, 상쾌, 통쾌한 재미는 아닙니다. 긴장의 재미가 있지요.

김혜자씨 연배의 어머니들은 대개 몰입해서 보신다고 합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함께 겪었음직한 에피소드들 앞에서 애틋한 모성애가 자극되는 듯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식 키우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뒤틀려진 사회, 아버지의 부재, 엄마에게만 맡겨진 양육의 짐.
어떻게든 아이를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키워야 하니까요.
정글보다 심한 식민과 천민자본주의, 무한 경쟁의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에서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고 자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듯 싶습니다.
용케도 대한민국이 이 정도라도 버티는 것을 보면 참으로 우리 어머니들은 용하신 분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그 뒤켠에 숨겨진 누군가의 책임과 잘못을 드러나게 합니다.
영화 보기보다는 재미없겠지만, 누군가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겠지요?

(이하 스포일러 아주 많습니다~그리고 말투도 바뀝니다^^)
누구에게 돌을 던질까? 1. 당연히 엄마에게!

김혜자씨가 연기한 엄마. 엄마의 삶은 말할 수 없이 고단했다.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는 그는 한약  재료를 파는 가게의 점원에 불과하다.
그는 그저 한약재로 쓰는 말린 풀을 손작두로 자르며 생계를 유지한다.
때때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무면허 침술사 노릇을 하기도 한다.
침술사 노릇도 한약재료 가게 주인의 저지로 쉽지 않다.
그는 혼자다. 이를테면 아버지의 부재이다.
생계수단의 제공은 전통적으로 남편이자 아버지에게 주어진 의무이지만,
영화에서 아버지/남편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삶의 고단함은 '도준'이 다섯살때 동반자살을 기도하게 할만큼 가혹했다.
얼마나 힘들면 자식에게 농약을 먹이고, 자기도 같이 농약을 먹고 죽고 싶었겠는가?
그 후유증으로 도준은 지적 능력에 장애가 생기게 된다.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지겠지만, 영화에서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다섯 살 때 농약이다)
삶은 곤궁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지적으로 지진하다.
죽을 수 없다면, 어떻게든 그의 아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엄마가 택한 전략은 아들을 강하게 키우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를 '바보'라 부르면 응징하도록, 그리고 한 대 때리면 두 대로 돌려주도록 끊임없이 세뇌했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처럼, 도준은 '바보'라는 소리만 들으면 아무 생각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이 단어에 도준은 무조건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어느 누구도 자식이 다른 사람들의 모욕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적으로 잘 성장하지 못한 도준에게 세뇌된 이 반응은 급기야 살인을 불러온다.
강자가 조롱할 때 도준은 피해자가 되지만, 약자가 조롱할 때 도준은 살인/폭력자가 된다.

자,  지금 엄마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
인간에 대한 배려, 이웃에 대한 사랑, 공동체 의식, 사회적 책임감?
웃기지 말라. 어떻게든 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아이들을 몰아간다.
그것의 방법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무조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 이기지 못하면 도태된다.
아이가 습득하게 되는 삶의 방식,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오로지 '승리'뿐이다. 다른 사람을 짓누르고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산다.

도준이 지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 뒤틀린 아이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도준은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는 과정 모두를 완전히 잊어버린다.
(언젠가는 생각이 나겠지만... 생각이 나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것들이 떠오르던 것처럼)
'도덕성', '인간성'을 상실하도록 엄마는 도준을 키운 것이다.
도준의 잘못은 순전히 엄마의 잘못이다!

누구에게 돌을 던질까 2. 개인의 무한책임만을 강조하는 사회!
최근에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시장(市場)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한국인이 직장을 잃게되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화의 90% 이상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죽어라' 시장에서 일해야 살 수 있고, 일 자리를 잃으면 인생도 끝장이 난다.
스웨덴 같은 나라는 직장을 잃어도 다른 경로를 통해 50% 정도의 수입은 유지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
한국 사회는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나눠진다.
물론 그 능력은 세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이 소유한 것이 많으면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대단히 고통스런 삶을 감내해야 한다.
무능력자. 한국 사회에서 필요없는 존재이다.
영화에서 홀로 된 '엄마'는 제 입에 풀칠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도준이 다섯 살 무렵 농약을 함께 마시게 된 것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엄마의 짐을 대신 나누어 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엄마의 짐은 그 만이 질 수 있고, 게다가 '도준'은 더욱 무거운 책임을 엄마에게 떠맡긴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우리 사회에는 없다.
성장과 분배의 논란이 일때면, 사람들은 대부분 성장에 손을 든다.
성장이 있어야 분배가 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성장하고 있을 때에도 분배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성장하지 않을 때, 더 고통스럽고, 힘들 때 분배의 문제가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감의 결여는 한 개인의 삶을 경쟁으로만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어느 누구도 함께 해 주지 않는 외롭고 고독한 엄마의 삶을,
고물을 모아 살며 외딴 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할아버지의 삶을,
몸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여중생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삶을...


영화에서 엄마는 기억력이 좋아지게 한다는 허벅지 안쪽의 침자리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뒤틀려버린 현대사, 아버지의 부재, 무한 경쟁의 현실을 기억해 내야 한다고 자꾸만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침자리는 은밀하게 숨겨진 곳에 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깊은 곳에 잠복해 있다.

젠장,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이 정도라면 행복해하면 되는 걸까?
도준이처럼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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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발리우드하고 뭔가 비스무레한 듯 하지만 달랐어..

물론 노래와 춤이 절대적으로 모라자고,

분위기도 좀 다르긴 했지만, 나름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내주면서도~

또 한쪽의 슬픈 결말도 있고...

근데, 이 영화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어.

슬럼독이 사라져서 빌딩이 되었고,

거기 살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흩어져버렸다고?

근데 슬럼독은 외곽으로 더 확장되어 가고,

범죄들은 더 기승을 부리고...

그저 대리만족만으로 만족하고 살아라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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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그의 죽음 장면....십자가에 달린 예수..
희생으로 소망과 구원을 창조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들 화끈한 복수를 꿈꾸지만, 그것은 또다른 비극의 시작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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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젤리나 졸리
'미스터앤미시즈 스미스' 같은 부류의 영화만 기억나는 안젤리나 졸리.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연기도 잘 하고...잘 어울린다.
니콜키드먼이나 메릴스트립이 쓰면 더 어울릴법한 모자라고 생각했는데,
첫 장면은 그렇게 어색했는데..전작의 아우라에 이미지가 묻히지 않는다.
나름 내공이 쌓인 것 같다는 느낌.

2. 경찰공화국
영화는 썩을대로 썩은 경찰. 부패한 경찰의 독주, 오만한 권력의 방종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권력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의 잇속을 챙기거나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더러운 힘들.
도대체 진리도 없고, 기준도 없고, 방향도 없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권력의 더러움.
용산에서 그렇게 사람이 죽어가도 미안하다 말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무혈동물들.
어찌나 닮았는지....
부패의 경쟁자를 죽이는 동안,
경찰의 실수, 음모를 감추기 위해 뻘짓하는 동안 스무명의 아이들이 사이코패스에 의해 죽어간다.
어찌나 지금과 똑같은지...
한쪽에선 시위 막는다고 경찰특공대가 밥 먹듯이 투입되고,
전투경찰들은 예전에 비할 데 없이 분주해지고...
대신 강호순 같은 사회가 낳은 살인마들은 곳곳에서 설치고 있고...

3. 교회의 역할, 목사의 역할
영화의 한 축에는 장로교 목사가 등장한다.
소위 현재의 복음주의 교단의 선조격이 되는 교단.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고, 여전히 흑백 차별의 기운마저 감지되는 보수적인 경향...
그런 장로교회 목사가 경찰의 비리를 밝히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았다는 것..
개인의 죄에만 집중한 채 시대와 공동체의 죄악에는 눈감고,
그 죄에 묻어 살아가는 기독인들.
아마 그 목사는 지금 우리 시대에서는 정치 목사라는 낙인 찍힌 채, 매장당하겠지..
공동체의 죄악을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바로 잡는 것 역시 신의 뜻이고.


4. 몇몇 장면들
- 1930년대. 매카시 선풍으로 뒤틀린 대로 뒤틀린 시대.
흑백차별과 여성과 아이에 대한 편견이 가득찬 풍경들.
영화는 흑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전쟁의 시대이자 광기의 시대였다.
모두가 미친 척 살아야만 하는 시대. 누구하나 용기있게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는 시대.
...지금은?

이 영화...재미도 있고 생각할 것도 많다.
지금 이 시대에 촛불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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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09. 2. 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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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결함을 찾아, 천국에서 가까운 사랑을 찾아... | 영화일기 조회수 64 | 스크랩 0
http://blog.cine21.com/ropheka/7856 2005-03-07 18:55:08

Far from Heaven...


파 프롬 헤븐은 삶의 어떤 구멍, 함정, 결핍에 관한 영화다.


구멍이란, 함정이란, 결핍이란 누구든지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결함이다.


결함이라고 해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것이 결함을 가졌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편견에 의해 가치 판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결함이란 차이가 있다는 의미와 더불어 그것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결함이라는 단어의 우선적 의미는 차이가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차이이기 때문에 보통 명사로써 결함이 된다.


서로가 가진 차이는 서로를 인정할 때 부각된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줄 아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나인 것을 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사회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혹은 결함을 자신이 인정하지 못한다면 결함은 끝내 나를 잠식하게 된다.


나에게 구멍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구멍은 점점 커져


마침내는 나를 구멍에 빠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성적 취향을 결함으로 가지고 있다.


그는 오래전에 그것을 발견했지만 어디까지나 감추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1950년대 중반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동성애란 어느 정도 불가항력적임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동성애의 반수 이상은 전기충격이나 호르몬 요법 같은 물리적 방법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질병’이었다.


미국 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이성애와 다를 바 없다고 인정한 것이 1994년의 일이고,


그 이전까지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결함이었다.


프랭크 자신에 의해서도 결함은 메워질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을 은폐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자신의 결함을 발견한 후 그는 8년 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달려왔다.


되도록 결함이 무엇인지 잊고 살기 위해 더더욱 그는 고투해 왔다.


프랭크는 그런 방식으로 삶에 대해 투쟁한다면


감쪽같이 결함을 묻어 버리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결국 감추어진 결함은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다.


내 안의 구멍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수록 커지는 법이다.


아내 캐시에게 들켜버린 자신의 결함. 끝내 고개를 내밀고 인정해 달라고 소리치는 함정.


프랭크에게 이 순간은 절망적이면서 동시에 희망적이다.


결함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마찬가지로 아내와 아이들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는 일이 되고 만다.


프랭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결함을 감추고자 한다.


이미 환하게 드러나 버린 결함이건만 아내만 아는 비밀로 은폐를 다시 시도한다.


결함이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할 뿐이다.


결함의 사실을 알아도 그것을 은폐해야 할 목적이 일치하는 사람사이에서 그것은 숨겨질 수 있다.


은폐의 공범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드러나기 시작한 결함은 더 이상 자신 속에서 통제될 수 없다.


아내와의 공범적 공감을 통해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동성애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에 가까운 한 달 휴가를 받았을 때


프랭크는 비로소 자신의 결함은 스스로의 의지로 좌우될 수 없는 것임을 경험하게 된다.


캐시에게 고백하듯 그에게 ‘사랑이란 것이 이런 느낌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됐어.’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은폐될 수 없이 드러난 결함은 다만 차이로만 인정되지 않는다.


이제 보통명사로써 결함의 진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가치 판단된다.


그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한 쪽을 편들기 때문에 대중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사회에서 버림받게 되는 일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진실하다고,


이것이 참된 것이라고 느끼는 사랑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가 받아들여야 할 고통은 진실한 사랑과 함께 그에게 온 것이다.


앞으로 그가 감수해야 할 인생은 결함을 차이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와의 줄기찬 투쟁으로 범벅되어야 한다.


결함을 감추고 은폐할 때 그의 인생의 목표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결함이란 감출 수 없고 감추려 할수록 힘을 얻는 것이라 인정할 때


그의 목표는 진실한 사랑을 찾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물론 그것이 이전까지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어 왔던 책임을 송두리째 내팽개치는 일이 되겠지만,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것이 결함에 의해 자신이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캐시에게 결함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내는 모범이다.


성공한 남편을 만드는 지혜로운 양처이며,


그녀는 아들과 딸에게 늘 또박또박한 어조로 바른 생활을 가르치는 현모이다.


파티를 열고 스스로 파티의 주인공이 되는 사교계의 여왕이다.


그녀는 딸에게서는 자신이 커서 닮고 싶은 여자이고, 남편의 친구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미인으로 칭송되며,


그녀의 단짝 친구로부터 부러움을 산다.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그녀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며 살기에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의 결함이 드러나자마자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본래부터 캐시에게는 없었던 결함이 남편의 결함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결함을 감추어왔을 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캐시의 모습은 언제나 페르조나의 모습이다.


자신의 감정과 속마음은 늘 감추어져 있다.


여자 친구들과 만나 남편과의 성생활에 대해 농담할 때에 조차도 캐시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남편이 다른 남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고서도 그녀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녀가 마침내 울게 된 것은 남편이 어쩔 수 없는 선을 넘어선 다음이었다.


늘 주변의 사람들 속에서 페르조나만을 보여주는 그녀에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단짝 친구 엘리나에게 고백하듯


흑인 정원사 레이몬드와 이야기할 때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캐시가 레이몬드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잡지사에서는 행복한 가정,

아니 사회적인 부러움의 대상이 될만한 가정을 꾸려가는 캐시를 취재하러 왔을 때였다.

프랭크는 자신의 결함이 무엇인지 일찍 알았던 반면 캐시는 그렇지 못했다.

결함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녀는 행복했다.

그러나 레이몬드가 등장했을 때, 그리고 그와 대화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결함을 발견한다.

그녀의 결함은 바로 소통하지 못함에 있었다.

그녀는 셀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사교계의 여왕으로 칭송되지만

정작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레이몬드는 전단지의 광고처럼 ‘다른 사랑’이 아니라 소통의 관계였다.

남편에게서, 단짝 친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소통의 감정들을 흑인에게서 느꼈을 때,

그것은 그녀를 압도하는 사회적 결함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서로 다른 피부색이 캐시의 결함을 은폐하도록 강요했다.

그녀가 발견한 유일한 소통의 관계였지만, 그녀는 백인이고 그는 흑인이므로 인정될 수 없다.

그녀가 레이몬드와 함께 트럭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고,

그 소문을 전해들은 남편이 술에 취한 채 회사에서 달려왔을 때 그녀는 절망했다.

애초부터 남편과의 관계는 소통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다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목표였을 뿐이었다.

자신이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음을, 또는 극대화된 페르조나 속에서

자신은 은폐되어 있다는 것조차 행복한 가정이라는 목표 때문에 감추어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소통의 관계가 다가왔을 때 남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프랭크의 결함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캐시에게 프랭크의 이러한 반응은 배신과 같은 것이었다.

하긴 둘은 처음부터 소통하지 못했으니

서로를 향해 쓴 가면이 드러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캐시도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결함과 타협하기 위해 애를 쓴다.

남편과 설전 끝에 레이몬드를 이미 해고했다고 말하고서,

그녀는 레이몬드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고하지만,

프랭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소통의 관계를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캐시는 조금더 용감했어야 했다. 좀더 자신감을 가졌어야 했다.

남편과 이혼한 다음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가 아니라

프랭크처럼 결함을 결함으로 인정하고 사회와 맞서 싸울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소통의 관계인 레이몬드를 뒷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찾았어야 했다.

먼 훗날 레이몬드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과 유일한 소통의 통로를 잃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소통 없는 삶이 그녀를 질식하게 만들어왔는데,

그녀는 다시 그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려는 것일까?

캐시의 삶에 대한 자신 없음, 혹은 투쟁성의 결여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흑인에 대한 차별에 관해 레이몬드와 이야기하면서

캐시는 다음 세대에는 그런 차별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감독은 레이몬드의 딸이 백인 아이들에게 테러 당하는 것을 보여 주면서

투쟁이 없이 바램을 갖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캐시는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몬드와의 관계 역시 그녀는 사회의 비난과 손가락질 때문에 스스로 포기해야 했다.

삶은 이 세상과의 끊임없는 투쟁일 수밖에 없음을,

미래에 어떤 낙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망각한 캐시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프랭크와 캐시는 자신의 결함이 사회적으로 드러났을 때 그것에 서로 다르게 대처했다.

프랭크는 행복을 찾아갔지만 무책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캐시는 책임을 감당하려 했지만,

그 대가로 유일한 소통의 관계를 포기해야 했다. 과연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국에서 가까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결함이 더 이상 감추어져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있는 결함은 서로를 사랑하며, 이해하며, 차이를 드러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럴 때에만 드러나고, 인정되며,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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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08. 7. 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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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도 난다.. | 영화일기 조회수 62 | 스크랩 0
http://blog.cine21.com/ropheka/11358 2005-04-27 16:57:40
이렇게 가슴 졸이며 보았던 영화가 얼마나 있었을까?

버려진 그 작은 아이.
그의 엄마는 아이를 개새끼라 불렀다.
부모를 죽인 군인들 때문에 얻게 된 아이.
결국 아이를 버리고 엄마는 자살을 하고.

버려진 그 작은 아이.
그가 헤매던 곳은 지뢰밭이었다.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끝장인 곳.
하늘 높은 곳에서 비행기로 뿌려댄 숨겨진 무기.
적군을 향해야 할 무기는 버려진 이 아이의 운명을 노리고 있다.
휴.....
아이를 구하러 들어간 위성.
오지마, 움직이지마 하고 소리친다.
급박하게 오가는 카메라의 시선.

전쟁 영화였다면 숱하게 죽어가고,
숱하게 폭격당하고, 숱하게 사지가 절단되어 나가더라도
아파하기는 커녕 그것을 즐겼을텐데...

휴....

꽝...!

바흐만 고바디의 절제된 영화문법 속에 고스란히 담겨진 현실.
영화의 힘일까, 현실의 엄혹함일까.
그 아이들의 눈물, 흐느낌, 몸부림....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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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08. 7. 2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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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의 <태어나기는 했지만 (生まれてはみたけれど, 1932)> | 영화일기 조회수 97 | 스크랩 0
http://blog.cine21.com/ropheka/11559 2005-04-28 15:41:49



맨날 말로만 듣던, 책에서만 보던...오즈.
차마 재미없을 것 같아 범접하지 못하던 차에...<태어나기는 했지만>을 보게 되었다.
1932년에 만든, 무성 영화.
하스미 시게히코가 '~ 한다는 것'이라고 제목을 달고 그것의 의미를 한껏 풀어 놓았던 오즈의 미학.
그것을 보게 된 것이다.
글쎄...한편의 영화를 보고, 그것도 한번만 보고 뭐라고 이야기할 순 없겠지.
한 편을 보고 그를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지나친 건방일거구.
그를 알기보다는 그의 한 영화를 본 것으로 평해야겠지.

영화에서 오즈는 줄곧 어린이들의 시선을 내세운다.
카메라는 어린이의 키 높이에 맞춰져있고, 그래서 어른들은 화면을 위아래로 길게 채운다.
때때로 짤리다시피 한다.
바로 그 높이에서 오즈는 삶의 고단함과 때때로 어쩔 수 없음을 은근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이 은근함은 어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어린이들은 이 은근함 속에 감춰진 부조리들을 너무나 당당하게 뱉어낸다.
'아빠는 훌륭하지 않아!'라고 소리칠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들의 그런 반응 앞에서 어른은, 아빠는 당연하게 엉덩이를 때린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한 것일까?
회사 중역에게 인사해야 좋지 않을까 라며 되묻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아이들의 질서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질서는 평화로움을 향해 나아간다.
아이들의 시선과 어른들의 시선은 상당히 격렬하지만,
오즈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지는 않는 것 같다.
도리어 그것은 더욱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겪어야 할 힘든 삶을 계속 살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리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소소한 즐거움들과 신선함들.
오즈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에
<태어나기는 했지만>이 감당하지 못 할 상처로 남지 않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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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08. 7. 2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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