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검색


728x90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겐 맨날맨날 낯설어. 너무 무서워서 겁두 나구, 나 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영빈의 초등학교 동창 현금의 이야기. 늘 바쁘게 살면서 이것 저것 당장에 눈 앞에 급한 것들을 치우고 나서 언제 여유라도 있었을까 되돌아 보면, 또 그만큼 쫓겨 왔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인지도 모르지만 쫓기고 쫓겨서 여기까지 왔다. 명료하게 드러난 세상의 모습에 비쳐진 내 모습은 너무 흐릿하고 불분명하다. 마치 떨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치는 것처럼 불안하고 힘든 시험을 치루는 듯 하다. 문득 문득 덤벼드는 실존의 고민과 아픔은 잊고 싶다. 종종 잊어 버리고 싶다. 

'나는 남편을 위해 먹을 것도 만들기가 싫다는 걸 알아낸 것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현금의 전남편은 현금에게 집밥이 먹고 먹고 아우성을 쳤다. 가정부가 해 준 밥은 집밥이 아니라고 우기는 현금에게 그건 하숙집밥이라고 했다. 벅차디 벅찬 세상 살이에 현금의 전 남편이 원했던 건 그런 것이다. 따뜻한 밥, 사랑하는 사람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차린 밥. 그건 남자고 여자고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느껴보고 싶고, 그런 느낌을 서로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현금은 알게 된 것이다. 팔려가듯 간 남편에게 주고 싶은 사랑이란 없었음을.

단 하루도 사람이 안 태어나거나 안 죽는 날은 없다. 영빈이 치킨 박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뒤늦게서야 깨달은 진실이다. 언제 어디서고 도처에서 이름도 모르고 왜인지도 모르지만, 죽고 태어나고를 반복한다. 무한하다 싶을 정도로 열려 있는 세계이지만, 그 죽음과 탄생이 나와 연관되었을 때에서야 나는 느낀다. 누군가 죽었다고, 누군가 태어났다고. 내 아픔이 시작된다. 내 기쁨이 시작된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누군가의 죽음과 탄생은 그저 그런 일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사람들은 죽어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사는 것 자체가 농담같은 건 아닐까? 나 한테만 심각하게 닥쳐올 뿐이지 타인들에게 진담으로 여겨지는 일들도 아닐텐데.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다가 끝에는 우리 모두 가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하지만, 누군가에게 따뜻한 집밥을 차려주고 싶듯, 오늘은 사랑하고 싶다.


영빈에게 남겨진 현금의 기억, 그녀가 불쑥 내밀던 빨간 혀에 대한 기억은 끝이 없다.
728x90

'行間의 어울림 > 文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 현대문학북스의 시 1  (0) 2008.09.17
손님  (0) 2008.09.17
밑줄 긋는 남자  (0) 2008.09.17
논문 잘쓰는 방법 - 움베르토 에코의  (0) 2008.09.17
바이올렛  (0) 2008.09.17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49



Late spring's Blog is powered by 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