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찾는 사람은 이미 가버렸고-그것도 처참하고, 쓸쓸하게-그 사람을 찾기 위해 사진을 내려놓는 다른 사람. 그 사람은 알고 있을까? 그가 왜 떠나가 버렸는지, 아니 사라져버렸는지..하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터이니 겉도는 술래잡기에 열중할 것밖에는. 이 소설은 예전의 단편인 '배드민턴 치는 여자'를 장편으로 옮긴 것이다. 군데 군데 예전 단편의 내용이 그대로 옮겨져 있고,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지만 예의 신경숙이 보여주는 문체의 힘은 여전히 강건하고 놀랍다.
미나리 군락지에서 그 어릴 적 박탈의 경험은 이후의 삶 속에서 무의식을 지배하는 바탕이 되었다. 거세 공포증처럼 인간의 무의식 속에 끊임없이 내재된 박탈의 불안감. 어렸을 적 경험과 관련없이 사람은 누구나 그 박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폭발하거나 사라져 버린다. 세상이 받아줄 수 없는 슬픈 존재가 되어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그가 꽃을 돌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늘 물을 머금고, 햇빛을 보게 하고, 정성스럽게 키워내지 않으면 썩어버리는 화초들을 대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과 어떤 연관을 지었을까?
그가 그토록 지향하는 그 남자에게, 그 남자가 보이는 어느 외진 공터에 바이올렛을 심으면서 그녀는 어떤 느낌을 견디어 냈을까? 그에 대한 욕망이 터오를때마다 심어 논 바이올렛. 결국 그를 삼켜버린 포크레인에 의해 역시 삼켜져 버린 욕망과 지향의 대상 바이올렛. 오산이는 강제로 박탈되었고, 떠나게 되었고, 사라지게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붙잡아 주지 않는다. 그가 떠난 곳을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가버린 곳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없다. 부질없이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작은 손짓만이 남겨져 있다. 다시 건져 올린, 삶에 대한 비관.
처음 먹던 녹차처럼 쓰디 쓴 경험들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어느 날 한순간 문득 느껴지다가 사라지는 녹차의 단맛과 같은 고단한 삶. 그 삶 속에서 제 감정, 제 느낌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데. 이제는 그 비관을 넘어서게 하는 힘을 찾았으면 좋겠다.
늘 기사를 쓸때마다 수동형의 문장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늘 늘어지는 만연체의 문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간단히 사람을 주어로 ~했다 라고 마치면 될 것을 ~은 ~을 ~해서 ~되었다 식으로 기사를 쓴다. 그 자신은 이렇게 쓰는 것에 길들여져 있어 별 문제를 느끼지도 못한다.
우리가 늘상 접하게 되는 영어를 번역한 문체들, 일어의 흔적들, 중국어 말투들에서 벗어난다면 훨씬 더 입맛나는 우리말을 쓸 수 있게 된다. 곧 문장에 힘이 생기고, 생기가 돌고,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생동거리는 느낌을 얻게 된다. 우리문장쓰기를 정독해 보자.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독되어 있는 죽은 말투를 버리고 살아 있는 말투로,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보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죽을 힘도 없을만큼 허덕이고 있을때 내 앞에 나타난 그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때 이 시집이 눈에 띄었다. 뿌리침을 당해 보았는가? 완강하게 거부하며, 잡은 손을 밀쳐내는 그 느낌을 겪어보았는가? 그리고 한마디 통보로 떠나가 버린 사람 탓에 두고 두고 가슴앓이하며 진정하고 있지 못할때, 그는 불현듯 나타났다. 어떻게 해야하나? 손을 내밀어야 하나? 아니면, 또다른 아픔을 감수하기 싫다고, 모른척하고 지나가 버려야 하나??
그 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머리 속을 뱅뱅거렸다. 그리고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싯구가 입을 맴돌았고, 결국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이겼다.
이 시집은 그런 힘이 있다. 그래도 배고프면 입을 없애버리라는 과격함이 있다. 그것과 함께 숨죽여야 하고, 눈물지어야 하고, 고개 숙여야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내 마음 속이 담겨져 있다. 서울의 예수에서보다는 덜 처연하지만, 묘한 갈림길에서 눈물짓게 한다.
안도현 시인의 초기 시집인 <그대에게 가고 싶다>를 다시 사게 되었다. 예전에 샀던 책들을 잃어버렸고, 그 잃어버린 책 중에 <그대에게 가고 싶다>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떠나간 사랑을 찾는 것처럼 찾을 수 없던 시집. 다시 샀지만 그럼에도 조금도 후회가 없었다. 그의 시어 하나 하나 속에 녹아있는 사랑과 삶과 집단에 대한 사랑이 녹아있다.
지금은 예전과 다른 개인의 내면에 치중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사랑이 끈이 되고, 큰 천이 되어 이 땅을 넉넉하게 덮어가는 힘이 될거라는 그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그의 '연애편지'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온통 늘, 힘 솟는 연애시절이었음 좋겠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더라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그런 힘참이 쉬지 않고 솟아나는 그런 세상말이다.
인간은 본래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가?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성질은 기쁨을 위시한 밝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슬픔인가? 그의 소설은 한없는 동감을 낳는다. 마음 맨 밑구석에 또아리틀고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슬픔과 비애를 꼭꼭 끄집어 낸다. 그리고 그의 내면 세계와 나의 내면 세계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것을 느끼며 동감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끝없는 동류의식은 내 맘 속에 담겨있는 것들을 모조리 퍼올리는 마력이 있다. 인생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같은 마음들인가?
다양한 삶의 모습들, 다양한 만나과 헤어짐들, 죽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감정, 한 가지 느낌으로 모여드는가? '질경이 꽃이 너무 하얘서요' 젠장, 너무 하얗다니. 그래서 떠났다니. 심장에 물밀듯 파고드는 무너짐. 그 한마디에 못 담을 것이 무엇이랴. 하얘서 떠났고, 하얘서 버렸다. 천지가 온통 아득해진다.
신경숙의 힘은 문득 내 마음 속에 본래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는 그저 내것이라 여겨지는 감정들을 열심히 퍼올리는 두레박같은 존재가 아닐까?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김난주 옮김,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 프로메테우스 / 2004년 1월
도모에학원의 교장선생님. 꿈을 주는 곳. 꿈 꾸기를 가르쳐 주는 곳. 중,고등학교 다닐때 학교교육이 무너졌다고 하더니 대학 들어오니 대학교육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대학원까지 가보았지만 대학원교육 역시 무너졌다고 한다. 내가 접해본 대학원교육까지의 심정은 아니나 다를까 똑같았다. 무너질대로 무너져버린 냄새나는 교육현장. 토토가 꿈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 교육은 구체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기차가 학교에 들어오는 꿈을 꾸면서 토토의 긴 여행은 시작이 된다. 우리는 언제라도 한번 제대로 꿈꿔본적이 있던가? 언제라도 한번 꿈꿔볼 생각을 했던가!! 더불어 사람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전에 선착순 경쟁을 배우고, 친구를 따돌리는 법을 알게되고, 내가 이익을 얻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교장선생님처럼 끈질기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덜 아픈, 힘든 생활을 할텐데..
로마교황청은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이미지를 제공한다. 천주교인 사이에서도 그 평가는 전혀 다르다. 베드로의 자리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은 지상 가톨릭의 황제. 그는 정녕 천상의 사신인가, 아니면 지상의 권력자인가? 교황 바오르 2세가 지난 날의 교황청과 가톨릭의 잘못을 고백했을때 가톨릭은 다시금 태어나는 신고를 겪었을 것이다.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교황들, 신의 뜻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교황들이 저지른 종교 재판과 이 세상에 대한 메시지들이 잘못되었다니.
한긴 <미켈란젤로의 복수>를 읽다보면 교황과 교황청은 훌륭한 소설거리일뿐, 감동을 줄만한 곳은 되지 못한다. [미켈란제로의 복수]가 그리는 교황과 시스티나 천정화의 관계는 사뭇 그 뻔한 교황청의 비밀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비밀은 쉽게 탄로날만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종교적인 비밀들은 신의 이름으로 철저히 묻혀 있어야 한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제거되든지 침묵해야 한다. 비밀이 발설되는 순간 어둠은 다가오며 그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복수>는 정말 전형적이다. 거기에 너무나 많은 복선과 이야기들을 깔아놨다. 반덴베르크는 너무 많은 욕심을 낸 것이다. 소설 속에서 작자는 어느 이야기 하나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했다. 줄거리가 진행될수록 반덴베르크는 이야기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침묵으로 묻어버리고 만다.
정작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런 것이었다면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려져서는 안될 비밀이 너무 많기때문에 침묵해야 한다면.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꺼낼 것이 아니었다. 그 많은 이야기를 그는 조금더 설명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이다. 침묵해야할 이유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글쎄, 미친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구분이 되기나 할까? 그러한 구분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심어주는 강박관념 같은 것 아닐까? 사실 매일 매일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길거리의 골목길을 다니다가 차사고를 당하거나, 혹은 강도를 만나거나 하는 확률이 얼마나 높은가? 내가 잠자다가 사고를 이세상을 종칠 확률은 또 얼마나 높은가? 그런 것들을 의식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 되는거다.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상이라면 이 세상은 정상적이지 못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그런 것이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장인정신. 원서를 번역하기 위해 몇대에 걸쳐 인생을 탕진(?)하는 사람들. 옥스퍼드가 만든 책이라면 어느 분야의 책이고 원자료의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지 하는 것들을 알고 싶었다.
물론 이책이 날 실망시킨 것은 그런 장인정신은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교수와 광인]의 줄거리를 이끌고간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우정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체스터 마이너는 사회가 강요한 삶 때문에 사회로부터 비정상인이 되어야 했다. 그에게 강요된 전쟁의 소용돌이는 한 인생을 망가뜨림으로써 그의 권리를 박탈하고 말았다.
어처구니 없는 살인을 저지르고 수용소에 평생을 갇혀있었야 했다.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수용소 구석에서 죽어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편찬은 새로운 인생의 희망이 되었다. 희망은 그런 식으로도 우리에게 오는가? 그 역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모든 권리를 누리고 싶었으며 자신이 가진 재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나름대로 성공했다. 옥스퍼드 사전이 미친 사람의 공로로 나왔다니..
이 해결되지 않는 물음에 [교수와 광인]은 성실히 답변한다. 내가 얻은 결론은 그것이다. 누구나 삶은 아름다울 권리가 있다는 것. 그 권리를 어느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것.
현현욱이 벌이고 있는 인생에 대한 태업. 그 심정은 내가 느끼는 것들과 똑같은 것이었다. 과거의 삶에 있어서 나의 목표는 언제나 치열하게 살자하는 것이었다. 치열하지 못하다면 어쩌면 이 세상이란 버텨내기 힘들 것이라는 부질없던 생각에 살아왔었다. 나에 대한 고민, 나에 대한 투자 그런 것들은 언제나 일상사의 맨 밑자리를 차지하는 일들이었다. 현현욱과 내가 다른 게 있다면, 그는 태업을 벌여도 먹고 살만하다는 것. 나는 태업을 벌이고 있는 지금 죽을 맛이라는 것. 예전에 읽었던 방현석 씨의 힘있는 문체, 그리고 사람의 심정을 읽어내는 밝은 눈을 잊지 않고 있다. 그가 그려내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여전히 당신의 왼편에서도 지나가 버렸지만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그러나 좀 지나쳤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그려주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것들은 구태의연해지기까지 했다. 어떤 일들은 매일 매일 반복해서 보더라도 눈물이 나는 일들이 있다. 광주항쟁이랄지, 70년대 한번의 투쟁을 조직하는 사람들이랄지, 그 시절을 살아나와 현실을 살아야 하는 부담감이랄지 하는 일들은 사실 그 자체로 눈물이 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면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전형화된 형상화는 글의 질척임과 긴장의 이완만을 가져온다. ..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으며 그렇게 지루했던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들, 내가 참여했던 시절도 있고, 그보다는 참여하지 못했던 시절이 더 많았지만 눈물나는 일이었으며, 나도 이제는 인생에 대한 태업에서 손을 뗄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업에서 손을 떼면 다시 노동으로 돌아가는 걸까?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고, 끊어진 경의선이 다시 이어지고, 장기수들은 북송되고,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모두가 잊혀지기를 원하는 지금. 기어코 지나간 이야기를 끄집어내 다시금 우리 갈길을 재촉한다. 오래된 정원은 어느 누구나의 가슴 속에 있다. 지나가버린 시절이 자신에게 역사의 현장이었든, 한 인간의 실존적 문제로 한없이 흔들리는 시절이었든 오래된 정원은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우리를 부른다. 황석영씨는 이 소설에서 비교적 역사의 현장과 개인의 실존의 문제를 균형있게 그렸다. 후일담 소설들이 가지는 한계들, 지나가 버린 시간에 대한 끊임없는 회한이 아닌 그 시절을 지금에 다시 살려내는 꿋꿋한 문체가 믿음직스럽다. 갈뫼에서의 만남과 헤어짐, 한윤희의 머나먼 이국땅에서 최후는 사실 같은 의미가 아닐까? 지금 세상은 놀랍게 변화해 가고 있지만, 그리고 예전에 그렇게 목청껏 소리높여 불렀던 목표들이 조금씩 성취되어 간다 해도, 잊거나 잊혀져 버린 나와 그들의 만남은 어찌할 수 없다. 마음 속의 오래된 정원을 찾아가는 일이 내게는 나를 버리는 일이 될 수 있음으로, 오래된 정원을 읽는 내내 후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