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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신은 종종 침묵해 왔다. 현대사 속에서 아우슈비츠의 그 참혹한 현장에서도,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시체 무덤에서도, 인종 청소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르완다와 코소보에서 벌어지는 살육전. 지구 어느 한 구석이라도 평안히 평화를 노래하며 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그 때마다 과연 신은 침묵했다.

침묵. 기치지로는 몇 번씩이나 배교한 자이다. 그는 구원받고 싶은 자였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힘겨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병적으로 신에게 매달리고자 하지만, 그는 약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다. 포르투칼에서 온 가톨릭 선교사를 차례차례 고발하는 기치지로는 영락없는 배교자일 뿐이다. 힘 있는 자 혹은 가혹한 탄압 끝에 순교 당한 자는 그를 향해 비겁한 자라 손가락질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약한 자일뿐이다. 고통당하는 약한 자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 과연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을 위해 죽는 일은 쉽지만, 비참한 것이나 부패한 것들을 위해 죽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배교자이자 버림받는 자인 기치지롤 위해 성화를 밟고 자신이 수모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인 성화에 발을 올려놓는 것은 끔찍한 배교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신만이 있었다. 고통이 있는 곳에서 그 고통을 이겨내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며, 부족한 것을 완벽하게 하는 신이 있었다. 신은 언제나 말해야 하는 존재이며, 신이 침묵하는 것은 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신은 침묵한다. 그 침묵은 고통과 처참한 현실에 대해 눈 감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 속에 그 처참한 현실을 함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겪는 끔찍함을 신도 나와 함께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포 하나하나에 느껴지는 그 고통들 속에 신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고통을 당하느라 미처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와 고통을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그러나 교회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교회에는 고통당하는 자보다 고통을 떠넘겨 주는 자들이 더 많다. 이 세상에서 그럭저럭 먹고 살며, 정신적인 위안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예수의 이름으로 고통을 전가하는 자들이 더 축복받은 자들이라 불린다. 교회 건물은 더더욱 하늘을 향해 높아가고, 이웃들 사이에서는 기피 건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통당하는 자 사이에서 고통당하신 예수, 고통당하기 위해 오신 예수를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 그대가 확신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는 없을지도 모른다네. 오히려 침묵하는 신이 더 좋은 그대들이여! 고통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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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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