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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의 어울림 - 해당되는 글 4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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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장 3일만에 서울고가공원에 가 보았습니다~

화분에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고, 

날씨가 더워서인지 조금 시들시들하긴 했습니다만,

도심에 걸을만한 곳이 있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오시더라구요.

월요일 점심 때였는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산책을 즐기시더군요.



산책길 중간 중간에 이런 투명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고가도로의 구조를 볼 수 있고,

맨 아래 지나다니는 차들까지도 훤히 보입니다!

저는 좀 무섭던데 딸님은 "뭐가 무서워~" 이러면서 신났습니다^^



이슈가 되고 있는 슈즈트리입니다!!!!

말로만 듣다가 직접 보니 뭐랄까 '잘 모르겠더라구요.'

기사를 읽긴 했는데, 막상 작품 앞에서는 뭔가 감동이 밀려오지는 않았어요.

다만 아쉬운 것은,

고가공원 위쪽에는 작품에 대한 의도나 설명, 설치 기간 등이

전혀 안내되지 않아서 더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듯 싶었습니다!

작품에는 뜻이 있을텐데, 

그냥 보고 느끼기에는 제가 역부족이네요ㅜㅜ



슈즈트리 맨 윗부분이에요~

삼선 슬리퍼들이 눈에 띕니다^^



생각보다 신발들이 엄청 많아요...T.T





길 중간 중간 수중 식물들을 볼 수 있어요~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철로 위에 지하철, 기차 쉼 없이 다니구요~





딸님은 멀어져 가는 기차를 보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가봐요^^




저 멀리 숭례문도 보이구요.

남대문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고 직관적인 거 같아요

ㅎㅎ




요기는 팁!

서울역 건너편 서울스퀘어 지하1층 로비 모습인데요,

차를 이용하시는 분들은 여기서 식사하시고,

한 시간 정도 시간내셔서 고가공원 다녀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가 그냥은 10분당 1천원이지만,

2시간 무료 주차권을 받을 수도 있으니...





그 다음 방문한 곳은 문 블랜드로 유명한

부암동 클럽에소프레소입니다~

여긴 주차하기가 늘 정말 마땅치 않아서 잘 안 가는데,

문 블랜드 때문에 갔습니다. 

역시나 주차할 데가 없어 한 바퀴 돌아 나오는 순간

출입문 바로 앞 자리가 비어 주차할 수 있었습니다.





커피상점답게 여러 커피 관련 도구와 원두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원두들의 특성이 별표로 붙어 있어서

기호에 맞춰 원두를 구입할 수 있죠^^





커피값이 싸다고 생각했는데,

영수증을 보니~ 쩝...ㅜㅜ





"오랜 전통의 블랜드 레시피" 문 블랜드=4321의 조화

아예 계산대에 큰 거, 작은 거 팝니다~

문 블랜드 커피맛은 옛날부터 맛있게 먹던 딱 바로 그 맛이에요.

드셔 보시면 압니다~





오늘도 즐거운 나들이가 아쉬움을 남기고 마쳐지네요^^

마침 오늘은 노무현대통령 추모일.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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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旅行  |  2017. 5. 23.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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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旅行  |  2017. 1. 23.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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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 8점
문희곤 지음/예수전도단


먼 옛날...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야만 했을 때,

무엇보다 관건은 라틴어로 묶여 있던 성경을 번역해 내는 일이었다.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누구든지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sola scripture(오직 성경)이 종개혁의 3대 구호 중에 하나가 된 것은,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교권주의자들에게 매여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근래에 들어 보수적 한국교회에 새롭게 형성된 신교권주의자들이 이 전철을 되풀이 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의 종에게 말씀하시지 않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다는 말씀을 악용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전유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우습게도 자기만이 주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신교권주의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해석도 자신의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통해서만 교인들에 대한 계시가 있을 것이라고 억측을 부리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라는 이 책은,

어쩌면 하나님을 갈급해 하는 모든  자들의 명쾌한 해설서이다.  

도무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앞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에게

이 책은 과감히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심지어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격려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신앙의 기본이며, 신앙의 마무리임을 설파한다.  

물론 이 책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어떤 구체적인 메뉴얼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연합의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신앙에 진전이 없고,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지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http://kamadeva.tistory.com2009-05-14T14:27:11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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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9. 5. 14.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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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 - 8점
곽윤섭 지음, 김경신 그림/동녘
글쎄, 책 내용이 싼 건 아니다.
책 제목처럼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가 들어 있다.
짧은 문장으로 된 충고에 가까운 글들이다.
사진 찍는다면서 종종 잘못 생각하는 바를 짚어 주기도 하고,
사진의 아주 간단한 원리를 알려 주기도 한다.
물론 한 두가지 마음에 깊이 와닿는 이야기들도 있다.
그런데 한 두번 쯤은 들었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하나 하나 고민해 보기에 좋은 주제들인 건 맞는데, 살짝 허무함이 다가온다.
사진에 관한 책이면서도 사진을 싣지 않은 지은이의 의도와 고집은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한 줄 말에 뭔가 조금 더 설명을 보태 주거나,
종종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 주었다면 어떨까 싶다.
하드 커버로 무게를 잔뜩 잡고 있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뭔가 좀 아쉽다.
http://kamadeva.tistory.com2009-05-10T04:33:10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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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잔의 차세 잔의 차 - 10점
그레그 모텐슨.데이비드 올리비에 렐린 지음, 권영주 옮김/이레
이슬람, 혹은 무슬림이란 단어는 금방 테러라는 단어와 연관된다.
9.11 이후 이런 현상은 우리 마음 내부에서부터 일어나 괜한 공포와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
원리주의자와 테러라는 '극단'의 모습 속에 숨겨진 내면은 그러나 상처와 고통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상상된 것은 AK-47 혹은 유탄발사기로 무장한 이슬람 군사들이 아니라
관용없는 태양 빛과 쉬지 않는 모래 바람 속에 공부하는 어린 아이들이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였지만,
심지어 탈레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머릿속에는 아이들이 떠나지 않았다.
그만큼 책의 주인공 모텐슨은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에 몰입했던 것이다.

K2 정복에 실패한 다음 죽을 고비를 맞이했을 때,
모텐슨은 자신을 도왔던 현지 지혜자의 바램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무수히 많은 학교를 세워간다.
 이 과정 하나하나에 이슬람의 미래가 바뀔 것을 믿으며...
테러와의 전쟁만이 테러를 끝내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처럼 쉽지만 바보스러운 생각도 없다.
이미 10억의 이슬람 사회는 '반미' '반기독교'로 똘똘 뭉쳐있다.
그리고 이슬람에 관한 왜곡된 신화는 반복 재생산되어가고 있다.
결국 얼굴없는 괴물로 모두에게 스산한 공포를 던져주고 있다.

이 책은 이 괴물의 고통스러운 내부로 우리를 인도한다.
탈레반과 이슬람 원리주의 아래 왜곡당하는 그들의 삶으로부터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마음 아픈 그 모습을 보여준다.
괴물의 얼굴을 알아갈수록 그 땅은 연민과 긍휼의 땅이지,
결코 폭탄을 퍼부어 무너뜨려야 할 땅이 아님을 깨닫는다.
책 제목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들과 세번째의 찻잔을 기울인다면 누구라도 가족으로 초대받을 수 있다.
이미 모텐슨이란 미국인이 해낸 그 자리는 누구든 가능하다.
따뜻한 마음만 있다면...
http://kamadeva.tistory.com2009-05-01T00:33:33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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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의 어울림 > 여러 關心事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0) 2008.09.17
      行間의 어울림/여러 關心事들  |  2009. 5. 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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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 방정일까? 이 책을 속초까지 가서, 비 오는 날 서점을 찾아 뛰어다니며 사서 아주 재미있게 읽어놓고, 불현듯 씹고 싶어졌다. 지금 시간이 그런 시간인가? 하긴, 조금 있으면 스님들과 불자들이 잠자리를 거두고 예불을 올릴 시간이니까, 내 시간으로는 늦디 늦은 시간. 자고 싶은 시간.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낭만주의 중-

시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고 시인은 벼르지만, 지금 변산은 전투중이다.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간척지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무슨 무슨 효과와 효율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한편에서는 죽어가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해변가에는 장승들이 모진 바닷바람에 맞서 서 있고, 사람들은 바다를 망치기로 작정하고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배를 몰아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기 전에, 배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곳으로 변하고 있는 그 곳에는 한 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천연덕스럽게, 낭만적으로, 낭만주의인지 정신의 넝마주의인지는 모르고 죽어가는 바다 앞에 시 읽을 줄 아는 것을 논하는 것은 내게 불쾌하다. 시인의 말처럼 놀지 않겠다, 절교다!

내가 그동안 이 세상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랑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 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
....나에게는 / 나에게는 이제 외로운 일 좀 있어도 좋겠다 -마흔 살 중에서-

왜 여기서는 <서른, 잔치가 끝났다>가 생각이 나는걸까? 시인보다 열살쯤 나이가 어리니, 그가 세상에 씨발이라는 욕이 튀어나오게 했다면, 나는 '씨'정도는 나오게 했을까? 허둥대며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그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날들일까? 바야흐로 마흔 살이 되었고 꾸역꾸역 나한테 명함 건넨 자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싶다고 시인은 적는다. 그 명함들이란 뭘까? 그에게 씨발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의 것일지, 아니면 그 반대의 것일까? 그가 지금 외로워지고 싶은 이유는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까? 지난 잔치는 이제 다 치우고 새로운 잔치를 벌이고 싶다는 것인지..

그의 시집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졌다. 그의 시집은 장중해야 한다. 예민하고 우리 살갗을 적시는 언어는 똑같았지만, 언어 속에 담긴 깊고 깊은 고민과 투쟁은 없다. 그가, 이제 잔치를 그만 두고 싶은걸까? 이제는 안주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무슨 무슨 주의자로 남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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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9. 3. 22.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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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로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다 떠나 두둥실 구름을 타고 떠도는 것처럼,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고, 맥을 못추게 만드는 것이 있다.
나에게는 티벳이 그곳이다.
파랗다 못해 한이 맺힌 듯한 하늘에, 살짝 흐르는 하얀 구름.
넓은 초원 혹은 광야나 돌무더기 위에서 하염없는 바람에 날리는 깃발들.
이곳의 장면장면들은 내게 속세의 시름을 덜어주는 '감탄사' 같다.

<칭짱 철도 여행>은 나의 이 로망을 거의 완벽하게 채워준다.
철도가 시작되는 시닝에서부터 영혼의 고향이라 불리는 라싸에 이르기까지,
책을 빼곡히 채우는 사진들은 그곳의 향기마저 느끼게 한다.
마음속에 티벳 혹은 라싸라는 단어가 담겨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눈을 떼기 쉽지 않을 것이다.
칭짱 철도의 노선을 따라 저자는 길마다 쉴 수 있는 곳, 먹을 수 있는 곳,  봐야 할 것들을 정리해 놓았다.
이 책 한권만 있어도 라싸까지의 길이 어렵지 않을 듯 싶다.
사람사는 곳마다 남겨진 자취를 저자는 잘 담아냈다.
여기까지 나의 로망의  감탄......

이 책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칭짱 철도 여행이긴 한데,
정작 칭짱 열차를 타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간 기착점들은 모두다 그림의 떡이 되고 만다.
칭짱 열하를 안 탔을 때 가 볼 수 있는 곳들이니까.
해발 5천 미터를 넘나드는 높은 곳, 하늘 길을 완벽한 밀폐된 채 산소공급장치가 달린
칭짱 열차로 휙~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참.....
쉽고 가볍게, 편한 침대칸에서 이틀만 들이면 너무나 편하게 라싸에 도착하게 된다.
갈등...

끝으로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칭짱 철도의 정치/역사/경제/사회적 맥락에 대한 평가는 이 책에 없다.
칭짱 철도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기대가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길 안내도일뿐이다....
물론 그 길조차도 가보지 못한 나에게 '맥락'에 대한 고민은 배고픈 자의 한탄일수도 있겠지만...
딜레마... 난, 칭짱 열차를 탈 것인가? 티벳을 마음속에만 로망으로 남겨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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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旅行  |  2009. 3. 2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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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인간의 문제, 그것은 모두가 연루되는 치사한 문제이다<역사의 한 페이지 中>. 이 세상 하늘 아래 인간들이 무리 지어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연루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이고, 이 관계에는 한 두명의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연루된다. 그리고 그 문제는 치사한 문제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기형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적당한 말이 없는<본능의 기쁨 中>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가 풀어가는 인간이란 참 딱한 존재이다.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존재들의 도움을 통해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하면서도 늘상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만이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할 존재라고 여긴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 속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로맹 가리는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엮어가고 있다. 열 여섯 편의 단편들은 제각각 다르고 특징이 뚜렷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파괴적이고 몰인정하고 극단적 이기주의이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로맹 가리는 집을 나선 한 여인의 수모와 몰락을 다루고 있다. 그 여인은 모욕을 감당할 길이 없어 바다로 달려가다가 목숨은 부지하지만, 자신이 당한 모욕으로 끊임없이 몸서리를 치며 괴로워한다. 모든 인간들이 그렇다. 끝끝내 죽음을 향해 가면서 생명을 조금씩 연장해 가긴 하지만 실상은 날마다 자신이 받았던 모욕을 되새기거나, 새로운 모욕을 만들어낸다. 가해자이건 피해자이건 이러한 모욕의 메커니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가짜>에서 등장하는 인간은 또 어떤가? 고귀한 가치가 있는 예술 작품을 둘러싸고 진위 논쟁이 벌어지다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살아있는 작품(?)이 사실은 위조되었음을 알게 된다. 

인간이라는 별로 깨끗하지 못한 존재에게 예술 작품의 진위가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가짜는 다 불살라버린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로 내 옆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살갗을 부딪히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거짓으로 도배되어 있는 가짜인 것을. 이 세상, 인간과 연루된 이 세상에서 참된 가치를 찾으려거든 <가짜>의 주인공처럼 홀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은둔하며 살아갈 것. 

<본능의 기쁨>에서는 난쟁이와 거인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간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사람들이라면 구역질이 나요, 선생님.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니까요. 그들은 속속들이 흉악해요. …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인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란 걸 말이요, 선생님, 하하!' 로맹 가리가 느꼈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혐오감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인간들은 난쟁이와 거인이 어떻게 섹스를 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거나 그들을 구경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이지, 난쟁이와 거인도 당연히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있다. '이럴 땐 정말 내가 인간이라는 게 부끄럽다니까.'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은 인간 운명의 어리석음과 운명 자체의 반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벽을 통해 흘러나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신음 소리가 실상은 '고통스러운 고독과 삶에 대한 총체적인 혐오감 때문'에 비소에 중독 되어 죽어 가는 소리였던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것도 절망적인 고독이라는 이유로 벽 하나를 두고 하나는 목을 매달고, 하나는 비소를 먹고 죽어 가는 것이 인간 운명의 어리석음이라는 말 말고 다른 어떤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로맹 가리가 일생을 신의 섭리에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더 이상 인간의 더러운 모습들을 관찰할 수 없다는 용기 어린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 운명에 매여 사는 인간들. 우리는 노예, 운명은 가혹했다. 언제쯤 인간의 치사한 연루는 막을 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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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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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3월


운명을 짊어진다고요? 글쎄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운명이 있지요. 운명이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택하고 혹은 선택 당하고 그리고선 선택된 길을 따라 가게 되지요. 분명히 내가 선택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운명이라 하겠지요. 하지만 진정한 운명은 종종 우리의 손을 넘어선다지요. 

<종소리>에서 처마밑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튼 새들은 스스로 선택한 축에 든다면,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계속 고통당해야 하는 ‘당신’은 선택당한 쪽에 들겠지요. 스스로의 뜻이든 아니든 그들은 고통을 치러야 했고, 끝내는 그 진한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떠나보내어야 했지요. ‘당신’은 직장을 옮기고 삶의 터전이 바뀌어 갔음에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운명은 혼자만의 것이라 생각하셨나요? 같이 나누어 주었더라면 ‘당신’이 훨씬 덜 힘들었을 텐데요. 둘이서 서로를 마주하고 식탁에 앉더라도 그것은 서로 다른 운명들의 만남이었나 봅니다. 나에게는 혼자서 고통당하는 당신을 지켜봐야 할 고통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그 고통 전부를 감당해야 했듯이. 그리고 티벳의 천장처럼 독수리들에게 온 몸의 살점을 다 떼어주고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짓는 경지에 올라서야 비로소 운명은 제 몫을 다하게 된 것일까요?

어느 날 '우물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허공을 떠돌던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그녀 역시 이 세상에서 운명과 다투다 우물에 들어앉게 되었지요. 그 누군가에게는 누군가의 위로가 늘상 필요하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혹은 그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려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독경을 가만 가만 읊어 주면 그녀는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지요. 누군들 그녀를 만나거들랑 모른 척하거나 도망가지 마세요. 운명은 혹시 모르잖아요. 당신 역시 자리를 못 잡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 지하 다방에 악어를 기르던 여자를 아시는지요? 아무도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잘 알지 못한답니다. 수족관에 악어가 어떻게 기어들어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구요.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답니다. 어느 누구도 아는 것이 없답니다. 더구나 밤마다 불을 지르고 다녔던 또 다른 그녀를 아는 사람이 누군들 있었을까요? 그냥 운명이 그들을 거기에 묶어 놓았고, 그렇게 있도록 했다고만 하기로 합시다. 이런 저런 설명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보다는 그저 있었다고만 생각하자구요. 호기심이 해결된다 해도 바뀔 것은 없으니까요. 어차피 모든 것이 '물 속의 사원'이 되어 이승에서는 탑돌이도 못할 테니까요.

자는 모양도 똑같이 오른발을 왼발에 꼬고 이마에 팔을 얹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그 손자의 고모와 할머니, 아버지. 할머니는 한사코 할아버지의 음주를 막으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보다 한 수 위입니다. 고모는 객지에 나와 나이가 차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손자의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지요. 부모님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저 동생에게 털어 놓다가 자존심만 상해했지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쓰러워 보이지 않으신가요? 술을 먹으면 병이 재발할 거라는 진단이나 또는 누군들 하고 싶어서 이혼을 했을까요? 직장에서도 잘리고 뭐 어디 얼굴이라도 내밀고 다닐 수 있겠는지요. 그냥 짊어지고 가기만 하면 된다면 운명이라도 쉽게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그 운명에 무릎은 꺾기고 허리는 지탱을 해 주지 못하는군요.

저 먼 낯선 땅에서 뇌종양의 큰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혹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아이 앞에서, 오히려 그 아이가 어머니를 위로할 때 뭐라고 대꾸해 줄 수 있을까요? 내가 앓는 병이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찢어지지는 않을 텐데요. 운명에 포위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 역시 삶은 불안한 적막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혼자 간 사람'이겠지요. 저 운명 내가 대신 못 지고, 내 운명 다른 사람에게 대신 넘겨주지 못하고 혼자서 지고 가야겠지요. 그것이 아픔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끝내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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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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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내가 당신의 균형 잡힌 삶을 난폭하게 허물고 도도한 감정의 물줄기에 격량을 일으키고 그리하여 나에게 속하지 않는 모든 것을 모조리 팽개쳐버리기를. … 당신에게 속할 수 있다면 당신의 환부라도 되고 싶습니다. 종양 같은 것이 되어서 당신을 오래오래 아프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고통을 달래느라 나에게 쩔쩔매고 배려하고 보살피겠지요. ” '연미와 유미'

당신은 타인이었는지요. 사람은 누구나 홀로 선 나무라고 했지요.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타인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되뇌어 보아도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 버리는 먼지 조각일 뿐입니다. 당신으로 향한 그 문을 열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설령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하더라도 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내 말에는 성처도 안 받습니다. 당신은 대꾸가 없습니다. 결코 존재 증명 따위는 할 수도 없습니다. 
비어버린 위장 안에서 울컥, 소리가 올라온다 싶더니 이윽고 눈물이 솟아 올라옵니다 '먼지속의 나비'. 아무리 당신이 타인이라지만 이토록 당신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은 차마 몰랐습니다. 하긴 우리가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이라 하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었겠지요. 그저 당신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며 추측이나 했겠지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각자의 즐거움뿐이겠지요. 입을 맞춘다 하더라도 그건 입술만의 만남일 뿐이지 우리 마음의 합일은 아니겠지요.

설령 당신이 결혼한 후에 내게서 연애감정과 섹스를 인출해 간다 하더라도, 마치 돈이 떨어졌을 때 잔고의 일부를 인출하듯이 당연하게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이해한 게 아니라 단지 습관을 바꾸지 못한 것이겠지요.'그녀의 세 번째 남자' 그래요. 우린 늘 따로였어요. 합한다는 건 환상일 뿐이에요. 고작 육체를 합할 수는 있겠지요. 진심인 것 마냥, 진실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마냥 스스로를 속인다 하더라도 우린 서로를 다 알 수 없겠지요. 

당신이 낯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건넬 말도 없기 때문인지는 아닌지요. 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습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갖게 된다는 것일 뿐이니까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타인에게 말 걸기'.

그러나 나는, 당신이라는 타인 앞에서 아무 것도 건네주지 못한 채 무의미해지는 나를, 나는 참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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