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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의 어울림 - 해당되는 글 4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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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연 / 대한기독교서회 / 1996년 12월

운동하면 지레짐작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우리나라 기독교 풍토속에서 예수운동이라 이름붙이는 건 굉장한 모험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예수운동이라는 것이 마치 자유주의 신학의 전용어처럼 사용되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문제는 어려워진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갓 외국에서 돌아와 자리잡은 신약학자가 이런 제목으로 책을 쓴다는 건 한국교회에 대한 도전일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이 책은 탁월하다. 하긴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이랴만은, 신앙의 보수성과 경직성에 의지하려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책이었으니 그만큼 칭찬하고 싶다. 이를테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기념하라'하신 것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었지, 결코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적은 없으시다는 것이다. 바울이 성만찬을 기록하면서 첨부한 '나를 기념하라'는 것은 바울 신학의 강조점이 다른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신학과 복음서의 신학을 가르고 그 차이를 명확히 하는 것은 경직된 우리 교회의 신학이 본래 얼마나 풍부했는지를 밝혀주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지은이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여러가지 근거들을 가지고 보다 더 어떤 공동체가 예수운동을 담지하고 있었는지를 밝히고자 노력한다. 또한 공동체들이 가지는 신학의 특수성들이 어떤 토양과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드러낸다. 지은이는 역사비평적 방법과 문학비평적 방법을 대표적인 무기로, 예수 운동의 실체에 가까이 가고자 노력한다. 그 결과의 하나로, Q문서에 대한 연구 결과를 결론처럼 제시하고 있는데, 이 Q문서는 바울이 그토록 저주해마지 않던 다른 복음일수도 있다는 전제를 두고서 Q문서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이란 무엇일까? 혹시 바울 스스로 케리그카에 경도된 신학자는 아니었을까?? 이 시대에 새롭게 조명되는 예수 운동에 많은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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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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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연 외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1999년 9월

참 재미나게 읽었다. 신약학 학자들이 쓴 책을 재미읽게 읽을 수 있다니. 세 명의 젊은 학자들의 글들은 하나 하나가 감칠 맛이 났다. 이전까지 읽었던 무미건조한 신약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살아있는 역사적 예수와 바울,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조태연교수가 쓴 예수에 관한 9개의 글들은 예수님이 살았던 당시의 콘텍스트,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직접 체험했을 그 정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 교회를 지배하는 교리에 얽매인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예수, 말씀하시고 계시는 예수,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며 형제애를 나누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교리에 얽매인 예수상이 무엇인가? 오로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하나님과 같은 분. 예수님은 성육신 하셔서 우리 곁에 오셨고, 우리와 함께 고난 당하고, 고통 당하시면서 우리가 겪는 실존의 고민들도 함께 하신 분이셨음을 되돌이키고 있다. 2부에서 차정식 교수는 예수님의 복음이 바울에게로 옮겨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겪었을 그 숱한 번민과 고뇌를 잘 살려놓았고, 성령의 역사와 바리새적 유대교와 유대교적 그리스도교라는 애매한 차이 앞에 길을 찾아나가는 헬라파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이 점차 신앙의 대상이 되어가는 과정등을 그간의 역사비평적 방법을 이용하여 적절하게 그리고 있다. 

3부에서는 바울의 복음을 다시 되짚어 보고 있다. 바울 그 역시 그가 겪어야 했을 컨텍스트 속에서 최선의 것으로 내놓은 그의 신앙 고백들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야고보서의 행동을 강조하는 믿음과 바울의 이신칭의가 과연 대립하는 것인지를 다루는 '믿기만 하면 된다구요?'라는 글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명확히 바울이 무엇을 지향하려 했는지를 알게 하는 빼어난 글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도 이러한 글들이 많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평신도들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더욱 깊은 고민과 감동을 선사해 줄 글들. 세 분 교수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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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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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적으로 접근한 성서의 인물들이란 것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성서에 많은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해 갈 수 있다는 것은 더욱 깊이 있는 성서 이해를 가져다 준다. 저자인 이나미씨가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는 것이 보다 더 진지한 접근이 가능하게 했을거라 생각했다. 

아담과 이브 이야기에서부터 다양한 느낌들을 받을 수 있었다. 뱀이라는 이미지 속에 담겨진 인간의 지혜 탐구가 죽음에 잇닿아있음을 밝히는 대목에서부터 교회가 제공하는 해석과 다른 관점들을 볼 수 있었다. 

카인은 우리 맘 속에 담겨진 증오심의 원형, 그리고 형제간의 경쟁 심리를, 노아의 옷을 벗고 자는 모습에 나타난 정신 의학적 관점을, 소돔성과 관련해서는 성적 편향성의 고민에 대한 교회의 폭넓은 관심을, 고단했던 지도자 모세에게서는 인생의 과정 속에 담겨진 삶의 의미들을, 3대 바보 중의 하나인 삼손에게서는 미숙한 남성성의 원형을, 에스델에게서는 권력을 절대시 하지 않고 자신의 옷치장을 걸레처럼 더럽게 여기는 아름다운 여인의 미덕을, 성격적인 약점을 지녔음에도 매력적인 다윗에게서는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불행 가운데에서 참된 의미를 찾는 토비트의 가족들, 욥이 겪어야 했던 깊은 고민과 좌절과 고통들, 이방인의 침략 앞에서 죽음 당한 어머니와 7 형제에게서는 믿음의 순수함과 절대성을, 요나이야기 속에서는 화려한 변신을 꿈꾸는 성인식의 이야기를, 애가를 통해서는 이름없는 민중의 노랫가락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는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를, 마리아와 마르타를 통해서는 일만하는 여자가 아니라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위대한 복음 전파자이지만 인간적인 약점에 시달렸던 바울에게서는 엄하면서 따뜻함을, 유다에게서는 내 안에 담겨 있는 어두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내 곁에 가깝게, 우리보다 먼저 삶을 살았고, 신앙을 고백했던 성서의 인물들. 그들과 대화하며, 그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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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애증이 느껴진다. 한국 교회의 철없는 믿음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지적들이 제발 허공에 맴돌다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고, 그의 학문적 방법과 내용을 본다면 철저하기는커녕 상업적 냄새 때문에 코를 다 막아야 할 판이다.

두 달여 동안 이 책을 읽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진짜 예수는 없더나? 하는 핀잔도 들어가며 읽어 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받았던 느낌은 단순했다. 이 책 역시 우리 교회의 현실을 꼬집고, 한국 교회 현실에 예수는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예전의 오덕호 교수의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류의 한국 교회 비판서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예수는 없다'는 분명하게 종교 다원주의 입장에 서있다. 예수만이 참된 길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 역시 구원과 진리에 이르는 다른 길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한국 교회의 배타적이고 비상식적인 신앙과 신학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한국 교회가 귀 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라면, 시대가 변화하는만큼 신앙의 내용과 방식도 변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강남 박사는 글로즈토드랜크 목사가 쓴 『기독교의 변혁』에서 변해야 할 10가지 패러다임을 소개한다.

1)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2) 상하구조에서 평등구조로 
3) 저 위에 계신 하나님에서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4) 교리 중심주의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 
5) 죄 강조에서 사랑 강조로 
6) 육체 부정에서 육체 긍정으로 
7) 현실 야합에서 예언자적 자세로 
8) 종말론에서 환경론으로 
9) 분열에서 연합으로 
10) 예수님에 관한 종교에서 예수님의 종교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고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일들이다. 그러나 그 뒤의 성경관과 신관, 예수에 대한 생각들에 있어서는 차라리 『기독교의 변혁』이라는 책을 번역만 하고 패러다임의 변화만을 소개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갖게 한다. 

오강남 박사가 지적한 성경관은 19-20세기의 서구 사회에서 성경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성경이 환경과 문화 속에서 고백되어진 신앙고백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부족신관은 그 당시의 문화를 포함한다. 지금의 눈으로 읽는다면 부족신은 그르다. 하지만 그 당시의 눈으로 본다면 옳다. 우리가 얻을 것은 부족신관 자체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것이 그 당시에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것은 지금 어떤 의미인지를 찾는 일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종교비교학자의 눈으로 볼 때, 성경은 구시대적인 생각들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서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책 제목으로 내세운 '예수는 없다'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4장 예수는 없다에는 항간의 떠도는 유언비어만이 적시되어 있었다. 동정녀 탄생의 신학적 배경을 찾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었지만, 성경이 누누이 강조하는 성령에 의한 잉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역시 그는 침묵한다. 역사적 예수를 찾기 위해서는 그는 좀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7-80여쪽 분량에 예수님의 성생활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유언비어만을 담아 놓고 버젓이 예수는 없다는 표제를 붙인 것은 대단한 상업주의이다.

애증..답답한 한국교회의 현실과 신앙을 꼬집고 제 자리로 돌아오게 할 많은 예언자적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러나 이 책처럼은 아니길 바란다. 좀더 진지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한국교회의 미래를 그려줄 사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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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오래 전에 사두었던 책을 이제서야 읽어보았다. 내 방에 함께 사는 동료가 추석에 집에 갔다 오면서 내 책을 스을쩍해서 먼저 읽은 것이 조금 마음에 남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책장에 내 책이 꽂혀 있었다. 얼른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간 남들 때묻은 책을 읽을 것 같아서...

책을 읽는 내내 이제 갖 접어든 30대라는 자리를 돌아보았다. 영혼의 사춘기 정도로 30대를 이야기하는 신경숙씨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20대 초중반에 가졌던 열정들과 믿음들이 무엇이었나에 대한 고민들이 꼬리를 문다. 작가가 겪었던 30대는 또 무엇이었을까?

출판사의 기획으로 출발한 공지영씨의 수도원 기행기가 이렇게 나와도 되는걸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들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 항복한 이야기들이며,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느끼는 여러 이야기들과 감정들이 이렇게 고스란히 들어있어도 될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수도원의 역사, 위치, 내력이 뭐가 중요한 것이겠는가? 수도원을 기행하는 사람이 그 안에서 새로움과 여러 느낌들을 받았다면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사는 거 별거 아냐, 사는데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아. 그러면 너만 자꾸 다쳐'에서 출발하는 그의 수도원 기행은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로 마치고 있다.

아르정탱을 거쳐 솔렘 수도원, 베네딕트 남자 봉쇄 수도원, 테제 공동체, 오뜨리브 수도원, 마그로지 여자 시토 봉쇄 수도회, 킴지의 수도원, 오스나 브뤽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몽포뢰 수도원, 림부르크 수도원. 그가 거쳐간 이 수도원들이 한결같이 풍기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하나님의 자애로움으로 느껴졌다.

산사에 머리를 깍고 출가하는 스님들이 다 이 세상에 대한 상처와 아픔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어렸을 적 생각처럼 수도원에 들어가는 이들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봉쇄 수도원에서 평생을 기도와 노동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 갔다기 보다는 그 길까지 오도록 인도한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었으리라. 작가는 그렇게 썼다. 신께서 불러주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나를 쓰시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였다. 조용한 성당에 앉아 있다가 나는 알아버린 것이다. 그건 그저 그냥, 사랑이었다는 걸.

작가는 수도원 기행 내내 자신의 삶에 대해 자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항복한 것이 어째서 행복한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닌가 봐요, 이렇게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수가 있어요? 그러니 항복합니다. 절대자 앞에 삶을 내려 놓았을 때 밀려드는 행복감. 무거운 짐을 지고 그 앞에 나아갈 필요가 무엇이랴. 18년 동안 내내 무거운 짐을 고달펐다면, 이제는 자유하리라. 봉쇄 수도원 안에서 봉쇄된 그들이 자유로운 것처럼, 내 삶에 유폐된 채 우리도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는가? 현실에 대한 무너짐이 아니라, 내가 고집하던 것들과의 결별일 뿐이다.

혹여 죽어도 용서못할 사람이 있다면, 죽도록 누군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작가가 간 길들을 생각해 보시길. 쓰러지고 싶고, 삶을 그만 놔 버리고 싶었던 경험이 있다면 읽어보시길. 아마도 그들이, 봉쇄된 공간에서 외치는 이 소리가 귀가를 맴돌게 될 것이다. 'c'est un miracle!' (그것이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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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몰트만 지음, 김균진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2년 11월

교회와 신앙의 성령을 거부하고,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의 성령임을, 그리고 모든 것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에 대한 몰트만의 신앙과 입장을 상세히 논술한 책이다. 

몰트만은 책의 입문 부분에서 성령을 단지 ‘구원의 영’으로 파악하며, 그 장소는 교회이며, 이 성령은 인간에게 영혼의 영원한 축복을 확신시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 마음속의 믿음과 사랑의 사귐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동시키는 영의 경험은 자연히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 성령을 자연 속에서, 식물 속에서, 동물 속에서, 땅의 생태계 속에서 재발견하도록 한다고 설명한다. 성령의 사귐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기독교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의 보다 더 큰 사귐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이러한 성령님의 우주적 넓이에 대한 사고는 지금까지 교회의 영으로만 국한되어 왔던 생각과 부딪히기 때문에 거부감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몰트만의 해방신학에 대한 입장도 쉽게 기존 교회가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라고 생각된다. 몰트만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성서의 전승들이 제시하는 하나님 신앙과 자유의 의지를 결합하고자 하는 최초의 설득력 있는 시도라고 본다. 따라서 종교와 보수적 정치의 동맹이 주장하는 환상들과 가치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이냐 자유냐 하는 논쟁에 가장 중요한 지점은 이스라엘의 엑소더스 전승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전승이 교회의 중심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이다. 구라파에서 미국의 제도화된 교회와 평화 운동,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도교회와 민중교회의 갈등은 하나님과 자유 중에 하나를 택일하라는 근대적 사고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적으로 극복되어져야 한다. 몰트만의 주장에 많은 공감을 느끼면서도 몰트만(뿐만 아니라 바르트 등의 신정통주의자까지도)의 고민을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사고 내지는 기존 교회와의 불화를 만들어내는 신학사상으로 폄훼하는 데에는 수긍이 안 간다. 

몰트만은 입문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데, 다른 교파들을 적대자나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교파의 한계를 넘어서며 이 한계를 개방하는 것은 “성령의 사귐”으로 가능한 일이었다(17p)고 설명한다. 우리에게서 혹은 서로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한 오순절 교단과 정교회가 에큐메니칼 교회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루터 교회와 가톨릭이 칭의와 구원에 관한 교리 논쟁을 다시 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성령님의 사귀게 하시는 힘으로 가능한 일이리라. 필리오케에 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그것의 의미와 또한 제한점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바울과 요한의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이 주도적인 힘을 발휘한 결과이며, 공관복음서의 영 그리스도론의 진리가 이제는 합해져야 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몰트만은 기독교적 삶(vita christiana)은 언제나 그 시대와 관련되어 있으며 콘텍스트적이라고 말한다. 구원의 증언으로서 기독교적 증언은 ‘치료하면서’ 주어진 사회의 병들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구원자”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종교 개혁은 중세사회의 공적 병들에 대하여 작용했으며, 인격적 성화에 대한 감리교회의 증언은 영국의 초기 산업사회의 병들에 대하여 치료적이었다. 그렇다면, ‘후기 산업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지금, 이 과도기 속에서 ‘기독교적 삶’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 책 내내 몰트만은 생명의 영이 어떻게 우리와 관계하고 계시며, 어떻게 죽음과 파괴를 거부하시고 생명을 주시는지, 생동감을 주시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그러한 생명력은 단지 인간의 영적 구원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콘텍스트, 온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는 현재 속에 주어진다. 교회와 신앙의 성령이 아니라 온 피조물의 성령님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죽음을 거부하고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의 생동감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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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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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1년 7월

세수를 했더니, 얼굴에 까칠한 것들이 돋아난다. 피부가 안 좋은 탓에 건조한 겨울이 되면 늘상 겪는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밭은 어떠한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세수를 한 듯 한숨을 내쉬고 나면 감춰졌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두 숨을 쉬면 마음 밭은 깊은 고랑이 생겨나고, 세 숨을 내쉬면 마음 밭엔 풀들이 돋아난다. 

조연현 씨의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은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 볼만한 곳들을 소개하고 있다. 역사의 시계추는 이성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알던 시대를 건너 다시 영성의 문제에 관심 갖도록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마음의 문제는 곧 영성의 문제이고, 영성의 문제는 삶의 방식이 아닌 세계관에 관한 문제로 옮아간다.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며,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이 세상은 충분히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17 군데의 영성 수련원들은 그러한 확신을 매듭지어 준다. 

이 책은 수련과 마음 수행의 방법들이 무척 다양하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종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조건 속에서 방법이 같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삶의 처지와 조건이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익혀진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마음에 있다는 것,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주변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 수련이라는 것이 본래 자기의 마음에 집중하고, 개인적 삶을 성찰하는 것에 목표가 있기에, 부당하고 불의한 주변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역동적 실천을 가로막는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실은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깨장에 가면 파트너의 손으로 먹여 주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임을, 나는 너이고 너는 나임을 드러내는 실천적 행위로 서로 음식을 먹여 준다. 그 사람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속에도 이미 모두가 한 몸임을 알게 하는 힘이 있다. 깨장에 참여했던 유리 씨가 분노 때문에 운동했던 과거를 돌이켜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운동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처럼 마음 수련은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식까지 변화시키게 된다. 

참선이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는 마음을 갈고 닦아 아무 것도 마음에 접근할 수 없는 경지를 가르쳐주고, 천도교 시천주수련을 통해서는 온 우주 만물에 빗대어 작디 작은 자아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 자아 안의 시련과 번민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끝없이 마음 경계에 벌어지는 마음들의 투쟁을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마음의 번민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원불교 마음공부, '구나', '겠지', '감사'의 끝글자를 합친 나지사를 통해 마음과 화해하는 법을 알게하는 동사섭, 절대자와의 끊임없는 대화로 존재의 의미와 고통의 의미를 밝히는 영신 수련. 부루더 호프의 공동체적 삶.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글쓴이가 모든 수행에 직접 참가해 보았다는데 있다. 하나 하나 참가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바탕으로 그것의 의미를 찾아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책 뒷편에 수련에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적어두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게 해 놓았다. 마냥 이곳에 등장하는 단체들을 바라다보고만 있기엔 글들이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크다. 마음 속 풀들이 풀 밭을 만들기 전에 마음 밭을 다시 들여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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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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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보그 외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1년 4월

책 읽기는 언제나 해석학적 요구를 한다. 내가 처한 상황과 처지,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기초로 책은 읽힌다. 여러 날 동안 낑낑대며 읽었던 <예수의 의미>는 내 고민과 우리의 현실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반성을 던져 주었다.

마녀재판이 횡행하는 한국이라는 현실, 고상하게 마커스 보그식으로 말하자면, 문자주의적, 교리적, 도덕주의적, 배타주의적, 내세지향적 기독교가 주류인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는 역사적 비평과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고민하고 그 의미들을 되새기는 일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 책의 저자들과 함께 공부한 많은 이들이 우리의 스승이 되어 신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자신이 갇힌 한국교회의 교리적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다시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예전에는 '과연 유다는 무엇을 배신했는가?'하는 따위의 질문법을 알지 못했다. 차라리 이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예수님의 탄식도 있는 마당에 유다가 무엇을 배신했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유다는 무엇을 배신하였는가? 성경은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맞춤함으로써 그가 예수임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데, 과연 예수가 누구인지를 몰랐을까? 유다가 배신했다는 것은 그 안에 또다른 많은 질문들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성경이 언급하는 단어들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했는데, 하늘 나라라든지 영생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어떤 해석이 옳은지 교리와 그 당시 의미 속에서 다시 재해석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 중에 기본이라 해야 할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이나 고민없이 무턱대고, 문자적으로 읽히는대로 해석해대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톰 라이트나 마커스 보그 둘 다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이렇다. 성경의 어떤 사건이 역사적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 과학은 반복되는 것을 다루지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것과 부딪힌다. 그렇다면 '만일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적합한 것이었다면, 내가 누구이기에 그것에 반대할 것인가?'하고 말할 따름이다. 톰 라이트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비평의 결과들을 무시하지 않지만, 스스로 그것을 비켜설 충분한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마커스 보그는 어떠한가? 예수의 이야기 전체가 은유화된 역사이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적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성과 상관없이 충분히 참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커스 보그의 생각은 전형적인 불트만을 닮았다. 실존 속에서 경험된 예수, 예수 사건이 실재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참되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가 분명한 역사적 토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커스 보그는 그 토대를 무너뜨릴 충분한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톰 라이트와 마커스 보그는 결론으로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배와 선교, 영성, 신학, 정치, 치유로 요약하며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통합, 유대인 메시아 예수와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예수 사이의 통합, 기독교인들의 서로 다른 경험들의 통합, 역사와 종말론의 통합, 역사와 신앙 사이의 통합을 주창한다. 반면 마커스 보그는 비판 이후적 소박함을 말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 비평과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성이 주인이던 시절을 통과하며 거쳐온 비판의 과정을 없던 것으로 되돌이킬 수는 없다. 비판적 사고는 마커스 보그가 설득하는 것처럼 새로운 이해를 낳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본래 전하고자 했던 본질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껏 한번도 제대로 역사 비평의 시대를 겪어 보지 않은 우리 현실은 답답하기만 하다. 진리는 어떤 악의와 험담 속에서도 진리이다. 오히려 진흙탕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이 책의 서로 다른 두 주장들이 나란히 토론되어지는 모습처럼 우리 현실 속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이 책 <예수의 의미>가 나에게 주는 최종적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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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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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 / 한들출판사 / 1998년 4월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이라 이름하는 20세기 신학의 거장. 그의 70회 생일을 맞아 내노라하는 동시대의 신학 거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름만으로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대신학자들. 에베하르트 윙엘, 도로테 죌레, 요한 밥티스트 메츠, 엘리자베트 몰트만-벤델, 필립 포터, 한스 큉. 뭐라고 이름을 붙인들 그들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할 듯 싶다. 이들이 몰트만의 70회 생일에 모여 '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무엇이 자신들의 신학을 방향지었고,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한 사람씩 돌아가며 고백하였다. 이 세미나의 결과물이 바로 <나는 어떻게...>이다. 세미나에 나선 사람들 모두 한결같이 시대의 아픔, 그리고 그 아픔을 어떻게 짊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통스러운 고민을 이야기한다. 

윙엘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이었다. 또한 반면에 스탈린주의 사회 안에서 자유를 말하여도 처벌받지 않는 장소로 카바레와 교회를 발견한 것이 그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 가운데 구체적으로 그 상황을 증언하는 이들에게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기대게 되었다. 몰트만은 공군 지원단의 일원으로 고사포 부대원이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의 동료들이 다 죽고 자신만 살게 되었다. 이날 밤에 처음으로 몰트만은 하나님에게 외쳤다.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들끓던 관심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가 몰트만을 동요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바르멘 신학선언을 초안하며 독일고백교회 운동을 이끌었다. 도로테 죌레 역시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지적한다. 어떻게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 어째서 그 이전의 신학과 똑같을 수 있는지 죌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가르텐을 통해 개념을 바꾸는 용기와 다시 질문하는 법, 역설적으로 되묻는 법을 배웠다. 

메츠 역시 아우슈비츠의 재앙으로 얼룩진 역사를, 어째서 신학이 그러한 재앙을 별로 쳐다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지에 깊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겪게 되었던 바닥공동체 생활이 그를 변화시켰다. 그라이나허는 월요일에 정치적인 사회에서 더 많은 정의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면 일요일에 강단에서 자유, 평등, 우애, 정의와 후원에 대해 설교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끊임없이 반추한 개념은 예언자에 관한 것이었다. 이 시대에 변함없이 예언자가 필요하며, 예언자적 운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지난 시대 속에서 끝나버린 역사가 아니다. 필립 포터 역시 그에게 주어진 현실의 상황-context-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해야 했다. 11살부터 식민 통치에 대해 반기를 들어야 했던 포터는 성서 본문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과 초대 교회의 역사, 여러 세기를 지나온 교회의 역사, 그리고 이 세계의 역사와 그 현실의 상황 안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역사는 어떠한가? 
근대사만 돌아보아도 외세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다. 식민의 상태에서 일제에 부역하던 자들, 친일파는 지금도 사회의 지도층이다. 전쟁을 겪어야 했다. 곳곳에서 학살이 있었고, 말로 할 수 없는 참상들을 지금까지 꺼내 놓을 수도 없었다. 긴긴 독재의 세월이 있었다. 그리고 설핏 민주화되었다는 요즘. 그러나 우리의 신학은 근대사 내내 똑같았다. 식민 침략과 전쟁과 독재, 민주화에도 우리 신학은 변한 것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가 바뀌고 상황은 바뀌는데 그 지평은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아우슈비츠를 겪고 나서도 변함없는 그 신학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신학은 무엇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냉정하게 버림받고 있는 기독교. 나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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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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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브래들리 지음, 배규식 옮김 / 따님 / 1996년 3월

이 책의 원제는 <God is Green>이고, '환경주의적 성서해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녹색은 즉자적으로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생명이 있는 푸르름의 색깔이 녹색이다. 이 책은 하나님의 색깔, 혹은 하나님의 의미가 녹색이라고 선언한다. 지구상에 환경 운동이 출현한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생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갈수록 파괴되어가는 생태계와 지구 환경은 분명코 인간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팽배해 있을 무렵에야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발맞춰 신학에 있어서도 생태주의적 신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온 세계와 사람, 하나님이 한 몸이라고 주장으로부터, 인간은 자연을 지키는 청지기여야 한다는 소박한 의견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계속되어져서는 안될 환경의 파괴에 기독교계가 생태신학으로 대답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대답의 한 방법으로 환경주의적 성서해석을 제시한다.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장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관심이라는 제목으로 이 땅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그의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음을 설명하며, 2장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 들판의 나무들이 기꺼이 즐거워하며 손뼉치는 무도임을 말한다.

3장에서는 자연계의 타락, 곧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타락하게 된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는 바울의 목소리를 제시하며 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4장에서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장엄한 의미들을 되살리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우주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의 고백 아래 인간 역시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릎꿇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결국 5장에서 인간의 역할은 어떤 위치가 되었든지 피조물을 잘 돌봐야 한다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 책은 성서에 대한 환경주의적 해석 말고도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성인들의 기도와 시를 인용한다. 바른 신앙은 균형을 갖추어야 하며,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현대에서야 등장하는 환경주의적인 성서 해석의 뿌리가 초기 기독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한국교회의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모습은 어떠한가? 건축물의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육면체의 교회 건물들 속에 푸르름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는 그저 사람들만의 구원을 위한 장소이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 역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만의 구원을 신봉하는 동안 우리 모두는 공멸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 성경을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대단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환경주의적 성서해석 역시 그러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 사역 자체를 인간에게만 한정짓는 좁은 믿음의 소유자는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 환경주의적 성서 해석은 최소한 인간 중심 신학에 대한 반격이다. 성서를 축소하려는 개인주의적 신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우리에게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는 내세만 바라보는 영혼 구원론의 변경을 요구하는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 만물, 피조물들의 슬퍼하는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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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環境-生態  |  2008. 9. 17.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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