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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의 어울림 - 해당되는 글 4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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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장 가슴 뛰게 하는 것, 그것은 자유였다.” 현경님의 자유를 향한 영적 순례. 그녀에 대한 평가들은 참으로 극과 극을 달린다. 나를 지도하는 교수님은 서슴없이 ‘무당 딸’이라는 호칭을 붙이고, 내가 아끼는 후배는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제목만으로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환호한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성령에 관한 강연을 했다는 것을 접하고 나서였다. 해방신학의 민중지향적 집단성, 아시아신학의 뿌리 깊은 영성, 여성신학이 강조하는 몸과 영혼의 불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집단적인 춤, 
아시아적 영성의 상징, 그림들로 가득 찬 제례적인 신학적 공연, 그리고 그 공연을 통한 강연”이라는 해설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결국 그녀가 지향하는 것은 해방이었고, 자유였다.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자유롭고 분방한 그녀의 신학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는 여성이 아니기 때문에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성이 겪고 있는 아픔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며, 지구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수치를 통해서 말고는 접하기 힘들다. 에코페미니스트이며,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여신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나는 정통 기독교의 세례를 받아 자라왔고, 그 안에서 이단 감별사가 다 되어 있으니 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이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주요한 표준이 될 수 없다고 받아들이면서도 종교에 관한 한 그 깊은 보수의 끈들을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 역시 그녀가 그토록 지향했던 자유에 대한 열망들을 가지며, 이 세상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종교들에 대해 심각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경님의 자유를 향한 영적 순례를 많은 기독교인들은 종교 혼합주의 혹은 종교 다원주의, 우상 숭배의 이름으로 정죄할 것이다. 

물론 나도 그의 영적 순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해악들을 보았고, 기독교가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는 위선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무엇이 가장 최선의 해방의 길인지에 대해 우리 모두는 충분히 논쟁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구도 현경님의 영적 순례에 돌을 던져서는 안될 것이다. 자칭 신실한 자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인 자들, 
그들이 가지 못한 길을 현경님은 온 몸을 던져 풀어 왔다. 

엄청난 댓가를 알고서도 그 길을 뚫고 나올 수 있는 현경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녀는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그녀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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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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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당신은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하고 계십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신은 종종 침묵해 왔다. 현대사 속에서 아우슈비츠의 그 참혹한 현장에서도,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시체 무덤에서도, 인종 청소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르완다와 코소보에서 벌어지는 살육전. 지구 어느 한 구석이라도 평안히 평화를 노래하며 쉴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그 때마다 과연 신은 침묵했다.

침묵. 기치지로는 몇 번씩이나 배교한 자이다. 그는 구원받고 싶은 자였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힘겨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병적으로 신에게 매달리고자 하지만, 그는 약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시련을 이겨내지 못했다. 포르투칼에서 온 가톨릭 선교사를 차례차례 고발하는 기치지로는 영락없는 배교자일 뿐이다. 힘 있는 자 혹은 가혹한 탄압 끝에 순교 당한 자는 그를 향해 비겁한 자라 손가락질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약한 자일뿐이다. 고통당하는 약한 자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 과연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을 위해 죽는 일은 쉽지만, 비참한 것이나 부패한 것들을 위해 죽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배교자이자 버림받는 자인 기치지롤 위해 성화를 밟고 자신이 수모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인 성화에 발을 올려놓는 것은 끔찍한 배교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한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신만이 있었다. 고통이 있는 곳에서 그 고통을 이겨내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하며, 부족한 것을 완벽하게 하는 신이 있었다. 신은 언제나 말해야 하는 존재이며, 신이 침묵하는 것은 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신은 침묵한다. 그 침묵은 고통과 처참한 현실에 대해 눈 감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 속에 그 처참한 현실을 함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겪는 끔찍함을 신도 나와 함께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포 하나하나에 느껴지는 그 고통들 속에 신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고통을 당하느라 미처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와 고통을 나누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그러나 교회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교회에는 고통당하는 자보다 고통을 떠넘겨 주는 자들이 더 많다. 이 세상에서 그럭저럭 먹고 살며, 정신적인 위안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예수의 이름으로 고통을 전가하는 자들이 더 축복받은 자들이라 불린다. 교회 건물은 더더욱 하늘을 향해 높아가고, 이웃들 사이에서는 기피 건물이 되어가고 있다. 고통당하는 자 사이에서 고통당하신 예수, 고통당하기 위해 오신 예수를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 그대가 확신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는 없을지도 모른다네. 오히려 침묵하는 신이 더 좋은 그대들이여! 고통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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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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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것은 일제의 침략 속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하던

중국 공산당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홍천오성기라고 하던가?

붉은 하늘 바탕에 별 다섯개가 그려진 그 국기를 휘날리며 일제의 탄압에 맞서던 중국 공산당.

그들은 일제에 의해, 또 국민당 정권에 의해 엄청난 고문과 박해를 받았다.

그들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독립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중국을 점령했다.

중국공산당은 최소한 인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시기에 기독교는 역시 공산주의를 싫어했다.

계급적 기반이 달랐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하늘에 속한 사람>의 이야기들은 항일 투쟁하던 중국공산당 대신 기독교가,

탄압하던 일제 대신 중국 정부로 대치된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주체와 대상만 바뀌었을 뿐 또다시 피의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 더 중국 인민들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중국공산당은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중국에서 기독교가 부흥하는 것은 기독교 본래의 사랑이 다시 그 땅을 감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 윈 형제가 피로 쓴 고백이다.

예수님의 이름만이 높임을 받는다면 그는 스스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이었다.

사역의 내용과 방향이 조금 달라진다 한들,

그가 어떤 탄압과 고통을 당한다 한들 그에게는 예수님의 사랑만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사랑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그가 그만큼 깨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들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들을 보내셨다.

그들에게 엄청난 비전을 담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비전을 감당하지 못했다.

끝까지 붙들지 못했다.

나의 비전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가?


<책 내용 중에서 발췌>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저 내게 맡겨라. 상황을 보지 말고, 너 자신도 보지 말고,

다른 사람도 보지 말라. 열심히 기도해라. 그러면 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고전 4:9,13)

"주님,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군요." 우리의 힘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것은 곧 패매가 아니고

하나님의 무한한 창고를 여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사역이 우상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하나님을 위한 일이 우선시되었다.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개입하시기 전까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에게

내 상태를 숨기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사역을 계속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 함께 기도하고 ... 성경을 읽었다. ..... 의무감과 타성에 젖은 행동이었다.'

"울지 말라. 내 백성을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 내가 택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 아니다.

다른 여러 사람들도 명령을 받았지만, 이 비전을 끝까지 붙들지 못했다."

"사람은 이 일을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마 19:26)

"박해가 멈추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기 바란다! 우리는 날라야 할 짐이 가벼워지도록

기도하기보다는 더욱 튼튼하게 견뎌낼 수 있는 동허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정말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고난과 역경을 몸소 통과함으로써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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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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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하는 것 같더니 훌쩍 담을 넘어버린 사람.

그와 그나마 한 시대를 잠깐이라도 살았던 것이 영광이 되면서도,

보다 더 가깝게 가지 못했던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800여 쪽에 이르는 평전의 곳곳을 채우는 그의 열정과 사랑.

그의 마음을 평전에 담아 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떠나는 사람 누구나가 몇 글자라도 남기는 것은 아니니까.

시대와 불화를 겪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꿈꾸던 미래를

문 목사님은 이미 살았던 것은 아닐까.

여섯 번의 감옥살이는 대표적인 시대와의 불화이겠지만,

그는 그 안에서도 행복했다.

배신과 타협의 계절. 혹은 심사숙고의 시절들을 겪으면서

급격하게 돌아선 우리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테제를 원하지만,

우리들의 테제는 나 자신을 위해 이기적인 것 말고는 남지 않았다.

문 목사님이라면 이때를 어떻게 살아가셨을까?

그 분이 남긴 발자국 속에 오늘의 하루하루가 숨 쉬고 있지만,

나는 그분과 함께 호흡하지 못한다.

무엇이 바른 길인지를 찾는 아직 정신적 방황기에 여전히 놓여 있다.

벌써 움직여야 할 땐데, 벌써 행동해야 할 땐데.

아니, 아니다.

문 목사님도 수십년의 고민과 단련을 통해 기다려 오셨다.

아직도 시간은 남아 있다.

조금 더 묵상할 시간, 조금 더 괴로워할 시간, 조금 더 농익을 시간.

마음 속 깊숙이 더욱 풍성해지자, 더욱 풍부해지자.

문 목사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심양에서 남한을 거쳐 북한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었던 그 길들을

우리가 따라 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보자.


용정에서 서북쪽으로 30리, 버들방천이라 부르는 작은 강이 흐르는 곳. 강 양편에 부락들이 있는데, 학교촌이 가장 컸다. 할아버지가 처음 당도했던 아편마을에는 윤동주네가 살았는데, 언덕 편으로 교회가 있고 큰 나뭇가지에는 종이 얹혀 있었다. (이것이 윤동주 시에 나오는 교회 첨탑이다.) – 131쪽


그렇다. 도쿄의 윤동주에게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은 시간적으로 멀고, 어머니는 공간적으로 멀며, 그가 열망했던 프랑시스 잠과 라이너마리아 릴케는 정서적으로 멀었다. 그 단절감, 그 막막한 공간의 숙명을 생각하면서 문익환은 치를 떨었다. – 225쪽


불교는 한국 산천의 아름다움이라도 보존하는데, 한국의 교회들은 과연 얼마만한 혜택을 교회 주변에 입히고 있는 것일까? 시골 곳곳에 서 있는 교회들과 산간 계속에 서 있는 불교의 건축물들을 비교해볼 때, 교회 건축들은 너무 꼴불견이다. 버스에서 내려 헐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느꼈는지 모른다. 왜 사가처럼 짓고 예배를 보면 안 될 것인가? – 355쪽


나는 얼마 전에 한 청년을 만나 이야기한 일이 있다. 그는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는 대뜸 "크리스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피워놓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서 집에 돌아와 성경을 펼쳤더니, 잠언 25장에서는 "피인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은 것 같으니라"가 되어 있는데, 로마서 12장에서는 숯불을 그의 머리에 쌓아놓으리라"가 되어 있다. 이러니 그런 인상을 받을 수 밖에. 공동 번역에서는 "그의 얼굴에 모닥불을 피어주는 셈이 된다"로 되어 있다. ... 원수에게 보복한다는 뜻은 사라지고 원수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을 잘 나타내게 되었다. – 382쪽


김 재준목사님은 지나가는 소리처럼, "콩나물에 물주기니라"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정신이 와짝 드는 것을 느꼈다. 설교란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구나. 그래야 사람들의 마음이 자란다. 이거지! 잊어버리지 않으면 시커멓게 병든 콩나물 대가리처럼 마음이 썩는다, 이거지! – 391쪽


"일 주일에 한 번씩 잠깐 교회에 나왔다가 집에 돌아가면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꿀단지는 다 집에다 숨겨놓고 몸만 왔다 갔다 하는" 관습적 교회 활동의 대안을 찾는 실험이었다. – 412쪽


나는 두르고 있던 빅토리 숄으 펼쳐서 보여주었다.
"숄 전체는 코바늘 네 코로 만들어진 작은 v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코바늘을 네 번 움직이면서 부인들은 '민주회복'을 반복해서 외웁니다. 마치 기도를 하듯이. 남편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뜨개질을 하면서 마음을 굳게 다지며 민주주의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빅토리 숄 하나를 완성하려면 코바늘을 정확히 만 번을 떠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이 선물을 주면서 만명의 기도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손재주가 없어서 코바늘뜨기는 직접 못 했고, 만들어진 숄을 커다란 상자에 포장해서 미군부대 우체국을 통해서 외국으로 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 501쪽


그 거룩하지도 않은 속된 땅에서 모세는 홀연히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종교적인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사회는 속된 것이라는 생각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모든 장소가,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이 거룩한 것입니다. – 512쪽


종교적인 경험을 말로, 논리로 표현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기독교는 말로 다 해버릴 수라도 있는 듯이 ‘말씀’, ‘말씀’을 지나치게 강조해왔거든요. 말, 말씀이 전부인 양 강조하는 신학에 내가 좀 진저리가 났었거든요. 말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말이란 본래 일회적인 성격이 강한 거 아니겠소?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인 일에 대한, 그 한 번 있는 일에만 적용이 되고 그 일에만 타당한 판단이 말로 표현되는 것이거든요. 그나마 언제나 그 일의 어느 한 면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말인데, 그 말이 그대로 보면 타당한 진리가 되어버리는 데 기독교 신학의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느끼던 차에 불교가 강조하는 ‘마음’에 눈을 돌리게 되었던 거죠. – 596쪽


20일째 되던 날 그들의 곡괭이 소리는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는 소리에 일제히 멎었습니다. 20일 동안 땅굴 속에 15명의 광부가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체력과 정신력이 얼마나 크냐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힘을 무엇이 터뜨릴 수 있었느냐 하면, 그것은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15명 중의 한 사람이 나머지 14명을 사랑으로 격려하고 도와서 20일 땅 속에서 살아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용기가 그들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구원은 사랑 이외에서 올 데가 없습니다. – 598쪽


그는 사람의 생리가 철저하게 민주적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첫째, 인체의 세포들은 하나하나가 독립성과 자주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세포들이 몸 안의 민주시민들인 것이다. 둘째, 대뇌의 지시를 받지 않는 자율신경이 있어서 신장, 위, 폐, 간장 등을 각각 자율적으로 관장한다. 지방자치제라 할 수 있다. 셋째,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있어서 교감신경은 부교감신경을 촉진시키는 기관을 억제하고, 역으로 부교감신경은 교감신경의 작용을 촉진하는 기관을 억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의 균형이 유지된다. 이것은 여당과 야당의 관계와 같다. 마지막으로 대뇌가 의식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지시하는데, 이 지시는 무턱대고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대뇌는 전신의 세포가 보내온 정보를 분석, 종합한 후에라야 지시를 내린다. – 602쪽


수도에 전문가란 있을 수 없다. 수도가 직업이어서는 안 된다. 수도자는 완성된 경지에 들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수도자는 언제나 초심자여야 한다. 수도자는 지금 도달한 경지를 언제나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어린애처럼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해답을 구하는 자세가 수도자의 자세다. – 7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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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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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모리 선생님은 아무 일 없는 듯 잘 돌아가는 주변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 세상이 멈춰져야 되는 게 아닌가? 저 사람들은 내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나 있을까? – 21쪽

대신 자신의 죽음을 삶의 중심이 될 마지막 프로젝트로 삼고 싶어 했다. ‘누구나 죽으니까, 기왕이면 자신의 죽음을 대단히 가치 있는 일로 승화시킬 수는 없을까?’라고 말이다. – 24쪽

선생님은 죽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토론하는 모임을 운영했다. 그 모임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죽음을 얼마나 겁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토론했다. 
‘죽어간다’는 말이 ‘쓸모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님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 26쪽

‘인간답게 사는 것’과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에 대해 생각하곤 했지만, 나와는 동떨어진 남의 인생 바라보듯 항상 멀찍이 선 채 바라볼 뿐이었다. – 33쪽

“마음을 나눌 사람을 찾았나?”
“지역 사회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나?”
“마음은 평화로운가?”
“최대한 인간답게 살려고 애쓰고 있나?” – 53쪽

“인생은 밀고당김의 연속이네. 자넨 이것이 되고 싶지만, 다른 것을 해야만 하지. 이런 것이 자네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자넨 너무나 잘 알라. 또 어떤 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네. 그걸 당연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아.”
“상반됨의 긴장은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과 비슷해.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중간에서 살지.”
“무슨 레슬링 경기 같네요.”
“레슬링 경기라. 그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묘사해도 좋겠지.”
“어느 쪽이 이기나요?”
“사랑이 이기지.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네.” – 61쪽

우리의 문화는 우리 인간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네. 그러니 그 문화가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굳이 그것을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 – 64쪽

의미 없는 생활을 하느라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느라 분주할 때조차도 반은 자고 있는 것 같다구. 그것은 그들이 엉뚱한 것을 쫓고 있기 때문이지. 자기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데 헌신해야 하네. – 65쪽

내가 고통을 당하고 보니, 이전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거야. 저번 날 밤에는 텔레비전에서 보스니아인들이 거리를 달려가다가 총 맞아 죽은 것을 봤어. 아무 죄도 없는 희생자들이었어. 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더군. 바로 내가 당한 일처럼 그들의 분노가 느껴졌어. – 73쪽

내가 고통을 당하고 보니, 이전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거야. 저번 날 밤에는 텔레비전에서 보스니아인들이 거리를 달려가다가 총 맞아 죽은 것을 봤어. 아무 죄도 없는 희생자들이었어. 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더군. 바로 내가 당한 일처럼 그들의 분노가 느껴졌어. – 73쪽

내가 고통을 당하고 보니, 이전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거야. 저번 날 밤에는 텔레비전에서 보스니아인들이 거리를 달려가다가 총 맞아 죽은 것을 봤어. 아무 죄도 없는 희생자들이었어. 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더군. 바로 내가 당한 일처럼 그들의 분노가 느껴졌어. – 73쪽

내가 고통을 당하고 보니, 이전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거야. 저번 날 밤에는 텔레비전에서 보스니아인들이 거리를 달려가다가 총 맞아 죽은 것을 봤어. 아무 죄도 없는 희생자들이었어. 울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더군. 바로 내가 당한 일처럼 그들의 분노가 느껴졌어. –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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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여러 關心事들  |  2008. 9. 17.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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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은성출판사-


1. 기도와 하나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자기 존재의 근저에 있는 참된 자아를 아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의 눈이 뜨이고 우리 자신의 참된 본질을 보다 분명하게 보기 시작하는 철저한 인간 경험이다.

진실로 기도는 자아 희생의 과정이며, 고립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무엇을 구하고, 지구의 궁핍함과 위기들을 놓고 간청하는 정도로만 생각한다(16). 기도는 신성을 함께 나누는 것이며, 인간을 하나님께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다.”(St Gregory of Sinai) 기도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기도이다(17).

기독교적 기도의 하나님은 관여하시는 분이시며, 사회적 하나님-교제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안에서 사회 생활, 공동체, 나눔이 있다(18,19).

그리스도인의 삶과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20).

우리는 기도할 때 이기적인 개인주의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 하는 것이다(42).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intercessio)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특히 이 기도에 어려움을 갖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고 계시다면 기도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중요한 점은 함께 일한다는 사실이다.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관계에 놓이게 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곧 행위이며, 기도와 행위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43).

모든 기도가 그렇듯이 중보기도도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정화(purification)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족의 일원으로, 중보기도를 진지하게 드리는 것은 고난을 의미한다(45).


2. 기도와 거룩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며, 거룩과 하나님은 일치한다(56). 거룩이란 근본적으로 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은 ‘엄위로움’과 ‘밝게 빛남’이란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거룩은 구원과 파멸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분이시다(56).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의 백성들이 거룩해질 것을 요구한다(57).

기도하는 것은 성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자신을 여는 것이고, 성령의 불에 붙을 수 있는 가능성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불에 맡기는 것이다(61).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불이다(63).

기도생활과 거룩으로서의 성장,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오는 강하게 타오르는 사랑으로의 성장은 분리될 수 없다. 성경은 은혜 안에서의 성장이 있어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장은 영적 고통과 갈등을 포함하며, 자아를 깨닫고 훈련시키는 길은 손해와 내적 고통을 참으려는 의지를 요구한다(64). apatheia(영혼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자유), parrhesia(하나님을 어린 아이와 같이 의지함).

참된 자아의 음성을 듣는 것, 이 음성이 기도의 인간적 근원이 된다(71). 내면으로의 여행이 단순한 자기 발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발견까지 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내 자신에게 있는 것보다 내게 더 가까이 계신다. 영혼이 그 보금자리를 찾아 들어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돌연히 그 영혼에 임한다(72, 73).

묵상기도 방법-William Johnston, 예수회, [정점-The still point]-

1) 긴장완화-좌정하고 휴식을 취하라.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2) 하나님의 실존 인식-하나님이 바로 거기 계심을 인식하라.

3) 하나님께 항복하라.

4) 받아들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라.

5) 회개와 용서-죄를 고백하라.

6) 묵상-하나님을 바라보라.

7) 영접-성령을 영접하라.

8) 중보-남을 위해 기도하라.

9) 찬양-하나님을 찬양하라.

기도는 은사이고 은혜이며, 나무에 점화된 불꽃이다. 기도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인간의 응답은 사랑과 경배로 나타나며, 바로 이 경배의 마음이 예배의 중심이 되는 마음이 된다(93).

성령은 능력(dunamis)의 경험이다. 성령은 바람과 불, 격렬한 활동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술취함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성령은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분이다. 성령은 기도하는 능력을 주신다. 성령은 윤리적 변화를 일으킨다. 성령은 말을 초월하는 것이다.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다(98,99).

방언은 은밀한 기도를 위한 은사이다(104).


3. 기도와 정치

‘나라이 임하옵시며’


영적 삶은 단순히 개인적인 자유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서의 자유, 사회적 무기력으로부터의 해방도 취급한다. 사실 신학적 결정주의(Theological determinism)라는 이름 하에 포기의 종교로 전환되도록 유혹을 당해오지 않았는가?(108)

예수님이 단순히 영적 나라만을 전파하신 순전히 영적인 인물로만 보는 견해는 분명히 잘못된 견해이다. 천국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고 주장하는 증거는 1) 악의 세력이 정복되었다, 2) 예수님의 기적이 천국의 임재를 증거한다, 3) 복음이 전파된다, 4) 천국은 구원의 은사를 통하여 임재한다, 5) 바로 메시야이시며 인자이신 예수님 자신이 천국의 증거이다(113).

기독교의 영성은 자신을 낮춰 종의 신분을 취하신 나사렛의 가난한 자의 영성이다. 눌린자를 자유케 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예수님은 완수하셨다(115).

사회정의가 결여된 예배는 헛된 예배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식의 결여로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124,125)


4. 기도와 교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성찬은 초대 교회의 기도와 삶의 중심이었다(155).

예수께서 하신 대로 우리도 네 가지 절차를 취한다(157). 1) 우리는 취하는 행위를 봉헌(Offertory)이라 부른다. 떡과 포도주를 취하여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 자신을 함께 드린다. 2) 축복하고 3) 떡을 떼는 과정은 ‘그의 거룩한 삶이 쪼개지는 순간에 우리는 그의 희생을 생각한다. 독생자의 희생의 순간에 육신의 모든 지체가 두려워 떨게 하자.’는 과정이다.  4) 나눔이다. 우리는 이 네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는 교제, 성찬의 절정에 이른다. 거룩한 교통은 성찬식의 절정일 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적 기도의 절정이다. 이 교통을 통하여 우리는 신령한 삶에 참예하는 자가 되며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된다.

성찬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행위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파괴적인 거부 행위가 된다. 그것은 불공평한 세상에서의 평등한 성례이다(167).


5. 기도와 참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


믿음이 없이는 죄에 대한 개념은 의미가 없다(173).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사랑의 하나님과는 상반되는, 무섭고 복수심이 불타는 하나님에 관한 시대에 뒤떨어진 견해의 잔재가 아닌가? 현대 예배에서는 이 진노의 개념이 끊임없이 무시되어 왔다(175).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성품의 다른 면일 뿐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본질적으로 불의와 억압을 태워버리는 빛남과 같으며, 진노의 반대는 사랑이 아니라 중립이다(176).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요 깨어진 관계의 치유이다. 이 기도는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기도의 위대한 속죄 사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도와 십자가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180). 1)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에 참예한다. 2)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예한다. 3)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예한다(181).

참회란 근본적으로 죄책감이나 자기 학대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적 동기와 의도를 가능한 한 의식을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내적 자세와 결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용서는 값없이 주신 선물이지만 회개는 값비싼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죄는 매우 파괴적인 것이기에 뿌리채 뽑혀야 하고, 죄를 끊어버릴 수 있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83).

회개는 자기 인정과 자기 부인 모두를 의미하며, 이 둘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보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거짓된 외양과 거짓된 목표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된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다(186). 자아를 아는 지식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신학은 영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187).


6. 기도와 내적 갈등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하기를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기를 기도하셨다(요 17:15). 따라서 우리도 충돌이나 마찰이 없기 위해서보다는 그것들을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러한 마찰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삶에 꼭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단의 원래 의미는 심판의 때에 송사하고 대적하는 자, 즉 대적을 의미한다(203,204)

십자가는 시험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이 십자가에서 생명과 기도가 흘러나온다. 존 크리소스톰은 교회는 예수님의 상처받은 옆구리에서 생겨났다고 하며, 오리겐 역시 신약의 흐름은 그리스도의 상처받은 옆구리에서 시작된다고 역설했다(207).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실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셨고 그리스도 안에, 고난 가운데 계셨다(209). 그리스도의 상처는 곧 기도이다.


7. 기도와 성장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기도의 길은 곧 성장의 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의 성장이요 하나님 안에서의 성장이며, 거룩함 안에서의 성장이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성장이요, 교제와 참회 속에서의 성장이요, 갈등을 통한 성장이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기도에도 항상 움직임이 있다. 기도의 사역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며,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부끄러운 교회이며 철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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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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