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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間의 어울림 - 해당되는 글 4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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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이창식 번역 감수 / 대교북스캔(대교베텔스만주식회사) / 2004년 7월


융은 인간이 온전하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 음과 양의 통합을 제시한다.

그는 내면에 있는 또 다른 나는 내가 가진 성(性)과는 다른 성을 지닌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통합시키는 것이 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남성이나 여성, 그 어떤 것도 한 쪽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가톨릭은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가톨릭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잘 융합시켜 왔다. 하나님이 남성을 상징한다면, 마리아는 여성을 상징한다.  남성을 상징하는 하나님이 남성성을 대표한다면, 마리아는 여성성을 대표한다. 진취적이고 성취지향적이지만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성을 여성성은 온화한 것으로 바꾸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역사이고, 남성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노력들이 득세해 왔다.

아마도 '다빈치 코드'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에서 감추어진 여성성을 끌어내려는 시도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기호학이 뒤섞이고, 그림 속에 담겨진 전설들을 좇아 가면서 지은이의 돋보이는 상상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청을 뒷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의 공통점대로 무엇인가 있는 듯 하지만, 별로 남는 것 없는 결론을 보여주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다빈치 코드' 역시 교황청에는 뭔가 숨겨진 것이 있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 안에는 아주 다양한 음모들이 엇갈리고 있으며, 교황청은 진리를 나타내는 곳이 아니라 비밀을 제거하고 감추어두는 곳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은 그간의 기독교의 진리를 뒤엎는 것이며 교황청은 엄청난 저항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그려 놓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다빈치 코드가 말하려고 하는 주된 주제 중의 하나인 예수는 아버지였다는 부분. 그리고 그 후손들이 있고, 후손들의 가계도가 있으며, 그것을 보호하려는 세력과 제거하려는 세력이 있어 왔다는 이야기. 이 얼마나 자주 이야기되었던 전설같은 이야기인가? 예수가 인도에 가서 몇 년을 수련했다는 이야기를 포함해서 끊임없이 떠돌던 낭설에 불과한 이야기 중에 하나이다. 예수가 아버지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성배를 찾았는데, 그것이 사람이었다는 것이 과연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다빈치 코드를 처음 읽을 때에는 지은이가 잃어버린 여성성을 찾기 위해 바른 길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여성성을 찾기보다는 변죽올리기에 바빴던 것 같다. 도무지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그래서 성배를 찾았는데, 그 다음엔 뭐야,  라는 질문말고는 떠오르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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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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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지음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6월


왠 방정일까? 이 책을 속초까지 가서, 비 오는 날 서점을 찾아 뛰어다니며 사서 아주 재미있게 읽어놓고, 불현듯 씹고 싶어졌다. 지금 시간이 그런 시간인가? 하긴, 조금 있으면 스님들과 불자들이 잠자리를 거두고 예불을 올릴 시간이니까, 내 시간으로는 늦디 늦은 시간. 자고 싶은 시간.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낭만주의 중-

시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고 시인은 벼르지만, 지금 변산은 전투중이다.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간척지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무슨 무슨 효과와 효율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한편에서는 죽어가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해변가에는 장승들이 모진 바닷바람에 맞서 서 있고, 사람들은 바다를 망치기로 작정하고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배를 몰아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기 전에, 배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곳으로 변하고 있는 그 곳에는 한 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천연덕스럽게, 낭만적으로, 낭만주의인지 정신의 넝마주의인지는 모르고 죽어가는 바다 앞에 시 읽을 줄 아는 것을 논하는 것은 내게 불쾌하다. 시인의 말처럼 놀지 않겠다, 절교다!

내가 그동안 이 세상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랑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 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
....나에게는 / 나에게는 이제 외로운 일 좀 있어도 좋겠다 -마흔 살 중에서-

왜 여기서는 <서른, 잔치가 끝났다>가 생각이 나는걸까? 시인보다 열살쯤 나이가 어리니, 그가 세상에 씨발이라는 욕이 튀어나오게 했다면, 나는 '씨'정도는 나오게 했을까? 허둥대며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그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날들일까? 바야흐로 마흔 살이 되었고 꾸역꾸역 나한테 명함 건넨 자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싶다고 시인은 적는다. 그 명함들이란 뭘까? 그에게 씨발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의 것일지, 아니면 그 반대의 것일까? 그가 지금 외로워지고 싶은 이유는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까? 지난 잔치는 이제 다 치우고 새로운 잔치를 벌이고 싶다는 것인지..

그의 시집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졌다. 그의 시집은 장중해야 한다. 예민하고 우리 살갗을 적시는 언어는 똑같았지만, 언어 속에 담긴 깊고 깊은 고민과 투쟁은 없다. 그가, 이제 잔치를 그만 두고 싶은걸까? 이제는 안주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무슨 무슨 주의자로 남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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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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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01년 6월


활자를 머릿속의 이미지로 떠올리고, 형상을 만드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지 몰랐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두고 싶었다. 눈 앞에 읽혀지는 것들이 그냥 하얀 종이 위에 아무런 의미 없이 박혀 있는 활자였으면 좋겠다며 어렵게 어렵게 페이지를 넘겨갔다. 

여전히 교회에서는 '믿는 사람들은 군병같으니'라든지,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흉한 적병과' 같은 찬송가들을 힘차게 부르고 있다. 성지를 회복하겠다고 부르짖던 십자군이 인류의 문명을 얼마나 욕되게 했던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그곳, 반도의 북쪽에서 일어났던 이 처참함을 무엇이라 이야기 해야 할 것인가?

'우리 형님은 죄인입니다.'라고 신천 학살극의 한 주인공인 류요한의 동생 류요섭 목사는 적는다. 신천에서 일어난 일이 피차 서로 죽이고 죽이는 일이었기에 누가 누구에게 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복수와 학살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훌륭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류요섭 목사는 자신의 형이 한 일들, 기독교인들이 벌인 학살에 대해 잘못했다고 말한다. 정작 이 땅위에서 친일파와 독재다들과 죄인들은 입을 다물고 잘 살아가고 있고, 누구하나 탓하지도 않는 묵인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에게 죄가 있는 것일까?' 류요한의 아내는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입에 담을 수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구역질나는 혹독한 죽음의 행진들이 하나님이 계심에도 버젓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정녕 하나님은 눈을 감아 버렸던가? 빨갱이들을 때려 잡기 위해 거사를 벌이기 전날,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악의 무리를 말끔히 없애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 것일까? 유태인들이 그렇게 학살되어 갈 때, 유태인들 역시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를 외쳤다.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입맛에 따라 이용해 버리는 인간의 이기심에 신물이 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썼다고 한다. 굿판에서처럼 산자와 죽은 자가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등장하고, 회상하고, 이야기도 제각각인 형식을 빌어서 썼다. 때때로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때도 있었지만, 지나 간 일이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나 뚜렷하게 부각된다. 역사적으로 경험한 일은 분명히 흔적을 남기고, 상처를 남긴다는 것. 죽게 되면 죽은 자들은 서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한계를 규정하며, 화해의 시도가 될 수는 없을까?

'이 백당놈우 새끼럴!
나는 이제 우리의 편먹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사탄을 멸하는 주의 십자군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시험에 들기 시작했고 믿음도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류요한은 눈빛을 잃어버린 나날이 되어갔다. '사는 게 귀찮고 짜증이 나서 그랬다. 조금만 짜증이 나면 에이 썅, 하고 짧게 씹어뱉고 나서 상대를 죽여버렸다.' 무엇이 인간을 이토록 오만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 세상에 시도된 그 모든 범죄 행위들의 바탕엔 기독교이든, 우익이든, 좌익이든 사람의 잔인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손님이라고 이름 붙인 기독교나 사회주의는 그 잔인한 인간의 바탕을 조금이라도 가리워 보고픈 인간의 욕망일 뿐인가? 도대체 나는 어느 곳에 내 사상적 뿌리를 박고 민족적 자존심을 찾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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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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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빛 속에 명료하게 드러난 바깥세상은 사실 나에겐 맨날맨날 낯설어. 너무 무서워서 겁두 나구, 나 한테 적의를 품고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아서 괜히 긴장하는 게 피곤하기도 하구.' 영빈의 초등학교 동창 현금의 이야기. 늘 바쁘게 살면서 이것 저것 당장에 눈 앞에 급한 것들을 치우고 나서 언제 여유라도 있었을까 되돌아 보면, 또 그만큼 쫓겨 왔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인지도 모르지만 쫓기고 쫓겨서 여기까지 왔다. 명료하게 드러난 세상의 모습에 비쳐진 내 모습은 너무 흐릿하고 불분명하다. 마치 떨어뜨리기 위해 시험을 치는 것처럼 불안하고 힘든 시험을 치루는 듯 하다. 문득 문득 덤벼드는 실존의 고민과 아픔은 잊고 싶다. 종종 잊어 버리고 싶다. 

'나는 남편을 위해 먹을 것도 만들기가 싫다는 걸 알아낸 것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현금의 전남편은 현금에게 집밥이 먹고 먹고 아우성을 쳤다. 가정부가 해 준 밥은 집밥이 아니라고 우기는 현금에게 그건 하숙집밥이라고 했다. 벅차디 벅찬 세상 살이에 현금의 전 남편이 원했던 건 그런 것이다. 따뜻한 밥, 사랑하는 사람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차린 밥. 그건 남자고 여자고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느껴보고 싶고, 그런 느낌을 서로에게 주고 싶은 것이다. 현금은 알게 된 것이다. 팔려가듯 간 남편에게 주고 싶은 사랑이란 없었음을.

단 하루도 사람이 안 태어나거나 안 죽는 날은 없다. 영빈이 치킨 박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뒤늦게서야 깨달은 진실이다. 언제 어디서고 도처에서 이름도 모르고 왜인지도 모르지만, 죽고 태어나고를 반복한다. 무한하다 싶을 정도로 열려 있는 세계이지만, 그 죽음과 탄생이 나와 연관되었을 때에서야 나는 느낀다. 누군가 죽었다고, 누군가 태어났다고. 내 아픔이 시작된다. 내 기쁨이 시작된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누군가의 죽음과 탄생은 그저 그런 일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사람들은 죽어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으니.

사는 것 자체가 농담같은 건 아닐까? 나 한테만 심각하게 닥쳐올 뿐이지 타인들에게 진담으로 여겨지는 일들도 아닐텐데.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다가 끝에는 우리 모두 가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하지만, 누군가에게 따뜻한 집밥을 차려주고 싶듯, 오늘은 사랑하고 싶다.


영빈에게 남겨진 현금의 기억, 그녀가 불쑥 내밀던 빨간 혀에 대한 기억은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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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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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콩스탕스는 발랄하다. 어느 날 문득 귀찮아진 남자 친구. 그의 요구가 점점 무례해진다고 느꼈겠지. 그러다가 그녀는 결국 혼자가 되었고, 자신만의 아름다운 버릇, 침대 위에 누워 책읽기를 여유롭게 가지려 한다. 그녀처럼 자기만의 버릇들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진 않지만, 가장 여유롭고, 가장 편안하고,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 자신만의 일.. 

그녀가 처음 접한 밑줄은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였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나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나 얼마나 기대감을 심어주는 말인가? 차버린 남자 친구처럼 책읽기가 한참 지루해지고 있을 무렵, '더 좋은 것이 있다' 정말 뭔가 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책에서 발견하는 밑줄들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문장들이다. 하긴, 책에 적혀 있는 대부분의 문장들은 사람에게 읽히기 좋은 형태와 문투로 자리잡혀 있겠지. 읽어줄 사람도 없는 책을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콩스탕스는 점점 밑줄에 관한한 박사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 상상력이겠지. 이 밑줄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펜으로 그려졌을지를 똑똑히 상상해 내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기질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가 밑줄을 긋는 습관일지도 모르겠지만. 

콩스탕스는 자신의 농락당하고 있다고 느낄 무렵에 밑줄들에 대해 다시 조립해보고 분석해 보지만 결론은 아리송하다. 그러다 다시 접하는 밑줄들은 분명하게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어쩜 그렇게 잘 알까? 이 책에 그 문장이 쓰여 있다는 것을 알고 밑줄을 그었을까? 아니면, 무슨 말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밑줄을 그었을까? 암튼, 그거야 중요하지 않겠지. 그녀가 지금 읽고 있는 밑줄이 자신에게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이 소설은 책은 말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성공작이다. 끊임없이 독자를 향해 열려있고,독자로 하여금 해석되기를 기대하고 바라고 갈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반응하고, 책은 독자의 시선을 통해 존재의의를 찾게 되는 것이고. 이를테면 해석학적 순환이 매우 잘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의 밑줄, 아탕뒤에 대한 해석까지 책을 읽으며 책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기다릴 줄 아는 자세에 대해 마무리하며 소설을 마치고 있다. 작가에게 책은 끊임없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인 셈이다. 콩스탕스의 내면 속에 쉴 새없이 속삭이며, 그의 영혼을 갈망케 하는 밑줄들. 

책에 밑줄을 긋는 습관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긋고 있는 이 밑줄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읽힐지 생각해 본다면, 아무대나 아무 의미없이 밑줄을 긋진 않으리라.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고, 밑줄을 그은 다음 다시 반추해 보고. 글읽기가 더욱 풍성해 질 것 같은 느낌. 

나는 이 책을 읽은 후로 오히려 더 많은 줄을 긋게 되었다. 책은 언제나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같고, 나는 너무 조금밖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같아 조바심이 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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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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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6월

'논문을 작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념을 체계화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방법론적 작업의 경험이며, 원칙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대상물>을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테마보다는 그 논문에 수반되는 작업의 경험이 더 중요하다.'

인문학이 죽어가는 마당에 논문을 잘 쓴다는 것은 별 의미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명원 사태인가? 피해자, 양심적인 고발자의 이름이 붙여진 표절 고발 사건처럼 우리 사회에서 표절은 공공연하다. 1차적 출전과 2차적 출전의 차이를 아는 대학생이 얼마나 될까? 오늘의 대학생들에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그 많은 자료들이 그들에게 1차적 출전이자 교과서가 된다. 이것저것 잘 짜집기만 한다면 그럴싸한 논문 하나가 나오는 셈이다.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법은 다른 데 있지 않아 보인다. 정직하게 쓸 것. 자신의 노력과 탐구 영역을 솔직하게 시인할 것. 어렵다면 주제를 줄일 것. 무식한 작업 같아 보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자료 정리용으로라도 쓸모가 있어 보인다면 충실할 것 등등. 우리네 글쓰는 방식, 양식과는 전혀 다른 솔직함을 내세우고 있다. 논문을 솔직하게 쓰기 위해서, 자료들과 참고 문헌 목록을 만들고, 카드를 만들어 자료들을 잘 정리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꼼꼼해 질 것을 요구한다. 

우리에게도 에코처럼, 글 쓰기를 잘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세세한 규칙들까지 일러주면서 솔직한 글 쓰기를 말해 줄 수 있는 솔직한 스승. 언제나 우리는 표절과 복제의 어두운 늪을 지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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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글쎄,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찾는 사람은 이미 가버렸고-그것도 처참하고, 쓸쓸하게-그 사람을 찾기 위해 사진을 내려놓는 다른 사람. 그 사람은 알고 있을까? 그가 왜 떠나가 버렸는지, 아니 사라져버렸는지..하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알 수 없을터이니 겉도는 술래잡기에 열중할 것밖에는. 이 소설은 예전의 단편인 '배드민턴 치는 여자'를 장편으로 옮긴 것이다. 군데 군데 예전 단편의 내용이 그대로 옮겨져 있고,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지만 예의 신경숙이 보여주는 문체의 힘은 여전히 강건하고 놀랍다.

미나리 군락지에서 그 어릴 적 박탈의 경험은 이후의 삶 속에서 무의식을 지배하는 바탕이 되었다. 거세 공포증처럼 인간의 무의식 속에 끊임없이 내재된 박탈의 불안감. 어렸을 적 경험과 관련없이 사람은 누구나 그 박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폭발하거나 사라져 버린다. 세상이 받아줄 수 없는 슬픈 존재가 되어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그가 꽃을 돌보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늘 물을 머금고, 햇빛을 보게 하고, 정성스럽게 키워내지 않으면 썩어버리는 화초들을 대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과 어떤 연관을 지었을까?

그가 그토록 지향하는 그 남자에게, 그 남자가 보이는 어느 외진 공터에 바이올렛을 심으면서 그녀는 어떤 느낌을 견디어 냈을까? 그에 대한 욕망이 터오를때마다 심어 논 바이올렛. 결국 그를 삼켜버린 포크레인에 의해 역시 삼켜져 버린 욕망과 지향의 대상 바이올렛. 오산이는 강제로 박탈되었고, 떠나게 되었고, 사라지게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붙잡아 주지 않는다. 그가 떠난 곳을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가버린 곳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없다. 부질없이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작은 손짓만이 남겨져 있다. 다시 건져 올린, 삶에 대한 비관.

처음 먹던 녹차처럼 쓰디 쓴 경험들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어느 날 한순간 문득 느껴지다가 사라지는 녹차의 단맛과 같은 고단한 삶. 그 삶 속에서 제 감정, 제 느낌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데. 이제는 그 비관을 넘어서게 하는 힘을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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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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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지음 / 한길사 / 1992년 3월

늘 기사를 쓸때마다 수동형의 문장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늘 늘어지는 만연체의 문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간단히 사람을 주어로 ~했다 라고 마치면 될 것을 ~은 ~을 ~해서 ~되었다 식으로 기사를 쓴다. 그 자신은 이렇게 쓰는 것에 길들여져 있어 별 문제를 느끼지도 못한다.

우리가 늘상 접하게 되는 영어를 번역한 문체들, 일어의 흔적들, 중국어 말투들에서 벗어난다면 훨씬 더 입맛나는 우리말을 쓸 수 있게 된다. 곧 문장에 힘이 생기고, 생기가 돌고,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생동거리는 느낌을 얻게 된다. 우리문장쓰기를 정독해 보자.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독되어 있는 죽은 말투를 버리고 살아 있는 말투로,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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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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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1997년 5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죽을 힘도 없을만큼 허덕이고 있을때 내 앞에 나타난 그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때 이 시집이 눈에 띄었다. 뿌리침을 당해 보았는가? 완강하게 거부하며, 잡은 손을 밀쳐내는 그 느낌을 겪어보았는가? 그리고 한마디 통보로 떠나가 버린 사람 탓에 두고 두고 가슴앓이하며 진정하고 있지 못할때, 그는 불현듯 나타났다. 어떻게 해야하나? 손을 내밀어야 하나? 아니면, 또다른 아픔을 감수하기 싫다고, 모른척하고 지나가 버려야 하나??

그 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머리 속을 뱅뱅거렸다. 그리고 사랑해서 미안하다는 싯구가 입을 맴돌았고, 결국에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이겼다.

이 시집은 그런 힘이 있다. 그래도 배고프면 입을 없애버리라는 과격함이 있다. 그것과 함께 숨죽여야 하고, 눈물지어야 하고, 고개 숙여야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내 마음 속이 담겨져 있다. 서울의 예수에서보다는 덜 처연하지만, 묘한 갈림길에서 눈물짓게 한다.

진정,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하는 것은 내 실존의 또다른 출발을 말하는 암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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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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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푸른숲 / 1991년 2월


안도현 시인의 초기 시집인 <그대에게 가고 싶다>를 다시 사게 되었다. 예전에 샀던 책들을 잃어버렸고, 그 잃어버린 책 중에 <그대에게 가고 싶다>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떠나간 사랑을 찾는 것처럼 찾을 수 없던 시집. 다시 샀지만 그럼에도 조금도 후회가 없었다. 그의 시어 하나 하나 속에 녹아있는 사랑과 삶과 집단에 대한 
사랑이 녹아있다.

지금은 예전과 다른 개인의 내면에 치중하기도 하지만, 서로의 사랑이 끈이 되고, 큰 천이 되어 이 땅을 넉넉하게 덮어가는 힘이 될거라는 그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과 다르지 않다. 그의 '연애편지'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온통 늘, 힘 솟는 연애시절이었음 좋겠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더라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그런 힘참이 쉬지 않고 솟아나는 그런 세상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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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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