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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3월


운명을 짊어진다고요? 글쎄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운명이 있지요. 운명이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택하고 혹은 선택 당하고 그리고선 선택된 길을 따라 가게 되지요. 분명히 내가 선택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운명이라 하겠지요. 하지만 진정한 운명은 종종 우리의 손을 넘어선다지요. 

<종소리>에서 처마밑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튼 새들은 스스로 선택한 축에 든다면,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계속 고통당해야 하는 ‘당신’은 선택당한 쪽에 들겠지요. 스스로의 뜻이든 아니든 그들은 고통을 치러야 했고, 끝내는 그 진한 고통 속에서 스스로를 떠나보내어야 했지요. ‘당신’은 직장을 옮기고 삶의 터전이 바뀌어 갔음에도 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운명은 혼자만의 것이라 생각하셨나요? 같이 나누어 주었더라면 ‘당신’이 훨씬 덜 힘들었을 텐데요. 둘이서 서로를 마주하고 식탁에 앉더라도 그것은 서로 다른 운명들의 만남이었나 봅니다. 나에게는 혼자서 고통당하는 당신을 지켜봐야 할 고통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그 고통 전부를 감당해야 했듯이. 그리고 티벳의 천장처럼 독수리들에게 온 몸의 살점을 다 떼어주고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짓는 경지에 올라서야 비로소 운명은 제 몫을 다하게 된 것일까요?

어느 날 '우물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허공을 떠돌던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그녀 역시 이 세상에서 운명과 다투다 우물에 들어앉게 되었지요. 그 누군가에게는 누군가의 위로가 늘상 필요하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혹은 그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차려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독경을 가만 가만 읊어 주면 그녀는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지요. 누군들 그녀를 만나거들랑 모른 척하거나 도망가지 마세요. 운명은 혹시 모르잖아요. 당신 역시 자리를 못 잡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 지하 다방에 악어를 기르던 여자를 아시는지요? 아무도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잘 알지 못한답니다. 수족관에 악어가 어떻게 기어들어오게 되었는지도 모르구요.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답니다. 어느 누구도 아는 것이 없답니다. 더구나 밤마다 불을 지르고 다녔던 또 다른 그녀를 아는 사람이 누군들 있었을까요? 그냥 운명이 그들을 거기에 묶어 놓았고, 그렇게 있도록 했다고만 하기로 합시다. 이런 저런 설명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보다는 그저 있었다고만 생각하자구요. 호기심이 해결된다 해도 바뀔 것은 없으니까요. 어차피 모든 것이 '물 속의 사원'이 되어 이승에서는 탑돌이도 못할 테니까요.

자는 모양도 똑같이 오른발을 왼발에 꼬고 이마에 팔을 얹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그 손자의 고모와 할머니, 아버지. 할머니는 한사코 할아버지의 음주를 막으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보다 한 수 위입니다. 고모는 객지에 나와 나이가 차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손자의 아버지는 이혼을 했다지요. 부모님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저 동생에게 털어 놓다가 자존심만 상해했지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쓰러워 보이지 않으신가요? 술을 먹으면 병이 재발할 거라는 진단이나 또는 누군들 하고 싶어서 이혼을 했을까요? 직장에서도 잘리고 뭐 어디 얼굴이라도 내밀고 다닐 수 있겠는지요. 그냥 짊어지고 가기만 하면 된다면 운명이라도 쉽게 짊어지고 가겠습니다. 그런데 그 운명에 무릎은 꺾기고 허리는 지탱을 해 주지 못하는군요.

저 먼 낯선 땅에서 뇌종양의 큰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혹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아이 앞에서, 오히려 그 아이가 어머니를 위로할 때 뭐라고 대꾸해 줄 수 있을까요? 내가 앓는 병이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찢어지지는 않을 텐데요. 운명에 포위된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 역시 삶은 불안한 적막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혼자 간 사람'이겠지요. 저 운명 내가 대신 못 지고, 내 운명 다른 사람에게 대신 넘겨주지 못하고 혼자서 지고 가야겠지요. 그것이 아픔이 아니길 바라면서도 끝내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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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文學  |  2008. 9. 1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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