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지음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6월
왠 방정일까? 이 책을 속초까지 가서, 비 오는 날 서점을 찾아 뛰어다니며 사서 아주 재미있게 읽어놓고, 불현듯 씹고 싶어졌다. 지금 시간이 그런 시간인가? 하긴, 조금 있으면 스님들과 불자들이 잠자리를 거두고 예불을 올릴 시간이니까, 내 시간으로는 늦디 늦은 시간. 자고 싶은 시간.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낭만주의 중-
시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고 시인은 벼르지만, 지금 변산은 전투중이다.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간척지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무슨 무슨 효과와 효율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한편에서는 죽어가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해변가에는 장승들이 모진 바닷바람에 맞서 서 있고, 사람들은 바다를 망치기로 작정하고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배를 몰아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기 전에, 배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곳으로 변하고 있는 그 곳에는 한 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천연덕스럽게, 낭만적으로, 낭만주의인지 정신의 넝마주의인지는 모르고 죽어가는 바다 앞에 시 읽을 줄 아는 것을 논하는 것은 내게 불쾌하다. 시인의 말처럼 놀지 않겠다, 절교다!
내가 그동안 이 세상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랑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 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
....나에게는 / 나에게는 이제 외로운 일 좀 있어도 좋겠다 -마흔 살 중에서-
왜 여기서는 <서른, 잔치가 끝났다>가 생각이 나는걸까? 시인보다 열살쯤 나이가 어리니, 그가 세상에 씨발이라는 욕이 튀어나오게 했다면, 나는 '씨'정도는 나오게 했을까? 허둥대며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그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날들일까? 바야흐로 마흔 살이 되었고 꾸역꾸역 나한테 명함 건넨 자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싶다고 시인은 적는다. 그 명함들이란 뭘까? 그에게 씨발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의 것일지, 아니면 그 반대의 것일까? 그가 지금 외로워지고 싶은 이유는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까? 지난 잔치는 이제 다 치우고 새로운 잔치를 벌이고 싶다는 것인지..
그의 시집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졌다. 그의 시집은 장중해야 한다. 예민하고 우리 살갗을 적시는 언어는 똑같았지만, 언어 속에 담긴 깊고 깊은 고민과 투쟁은 없다. 그가, 이제 잔치를 그만 두고 싶은걸까? 이제는 안주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무슨 무슨 주의자로 남고 싶은 것일까?
황석영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 2001년 6월
활자를 머릿속의 이미지로 떠올리고, 형상을 만드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지 몰랐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두고 싶었다. 눈 앞에 읽혀지는 것들이 그냥 하얀 종이 위에 아무런 의미 없이 박혀 있는 활자였으면 좋겠다며 어렵게 어렵게 페이지를 넘겨갔다.
여전히 교회에서는 '믿는 사람들은 군병같으니'라든지,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흉한 적병과' 같은 찬송가들을 힘차게 부르고 있다. 성지를 회복하겠다고 부르짖던 십자군이 인류의 문명을 얼마나 욕되게 했던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그곳, 반도의 북쪽에서 일어났던 이 처참함을 무엇이라 이야기 해야 할 것인가?
'우리 형님은 죄인입니다.'라고 신천 학살극의 한 주인공인 류요한의 동생 류요섭 목사는 적는다. 신천에서 일어난 일이 피차 서로 죽이고 죽이는 일이었기에 누가 누구에게 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복수와 학살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훌륭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류요섭 목사는 자신의 형이 한 일들, 기독교인들이 벌인 학살에 대해 잘못했다고 말한다. 정작 이 땅위에서 친일파와 독재다들과 죄인들은 입을 다물고 잘 살아가고 있고, 누구하나 탓하지도 않는 묵인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에게 죄가 있는 것일까?' 류요한의 아내는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입에 담을 수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구역질나는 혹독한 죽음의 행진들이 하나님이 계심에도 버젓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정녕 하나님은 눈을 감아 버렸던가? 빨갱이들을 때려 잡기 위해 거사를 벌이기 전날,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악의 무리를 말끔히 없애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 것일까? 유태인들이 그렇게 학살되어 갈 때, 유태인들 역시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를 외쳤다.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입맛에 따라 이용해 버리는 인간의 이기심에 신물이 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썼다고 한다. 굿판에서처럼 산자와 죽은 자가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등장하고, 회상하고, 이야기도 제각각인 형식을 빌어서 썼다. 때때로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때도 있었지만, 지나 간 일이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나 뚜렷하게 부각된다. 역사적으로 경험한 일은 분명히 흔적을 남기고, 상처를 남긴다는 것. 죽게 되면 죽은 자들은 서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한계를 규정하며, 화해의 시도가 될 수는 없을까?
'이 백당놈우 새끼럴!
나는 이제 우리의 편먹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사탄을 멸하는 주의 십자군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시험에 들기 시작했고 믿음도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류요한은 눈빛을 잃어버린 나날이 되어갔다. '사는 게 귀찮고 짜증이 나서 그랬다. 조금만 짜증이 나면 에이 썅, 하고 짧게 씹어뱉고 나서 상대를 죽여버렸다.' 무엇이 인간을 이토록 오만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 세상에 시도된 그 모든 범죄 행위들의 바탕엔 기독교이든, 우익이든, 좌익이든 사람의 잔인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손님이라고 이름 붙인 기독교나 사회주의는 그 잔인한 인간의 바탕을 조금이라도 가리워 보고픈 인간의 욕망일 뿐인가? 도대체 나는 어느 곳에 내 사상적 뿌리를 박고 민족적 자존심을 찾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