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 보그 외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1년 4월
책 읽기는 언제나 해석학적 요구를 한다. 내가 처한 상황과 처지, 내가 알고 있는 바를 기초로 책은 읽힌다. 여러 날 동안 낑낑대며 읽었던 <예수의 의미>는 내 고민과 우리의 현실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반성을 던져 주었다.
마녀재판이 횡행하는 한국이라는 현실, 고상하게 마커스 보그식으로 말하자면, 문자주의적, 교리적, 도덕주의적, 배타주의적, 내세지향적 기독교가 주류인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는 역사적 비평과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고민하고 그 의미들을 되새기는 일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 책의 저자들과 함께 공부한 많은 이들이 우리의 스승이 되어 신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많은 이들은 자신이 갇힌 한국교회의 교리적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다시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예전에는 '과연 유다는 무엇을 배신했는가?'하는 따위의 질문법을 알지 못했다. 차라리 이 세상에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예수님의 탄식도 있는 마당에 유다가 무엇을 배신했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유다는 무엇을 배신하였는가? 성경은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맞춤함으로써 그가 예수임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데, 과연 예수가 누구인지를 몰랐을까? 유다가 배신했다는 것은 그 안에 또다른 많은 질문들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성경이 언급하는 단어들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했는데, 하늘 나라라든지 영생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어떤 해석이 옳은지 교리와 그 당시 의미 속에서 다시 재해석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 중에 기본이라 해야 할 이러한 해석학적 작업이나 고민없이 무턱대고, 문자적으로 읽히는대로 해석해대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톰 라이트나 마커스 보그 둘 다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이렇다. 성경의 어떤 사건이 역사적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 과학은 반복되는 것을 다루지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것과 부딪힌다. 그렇다면 '만일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적합한 것이었다면, 내가 누구이기에 그것에 반대할 것인가?'하고 말할 따름이다. 톰 라이트는 지금까지의 역사적 비평의 결과들을 무시하지 않지만, 스스로 그것을 비켜설 충분한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마커스 보그는 어떠한가? 예수의 이야기 전체가 은유화된 역사이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적인지 아닌지가 아니다. 역사적 사실성과 상관없이 충분히 참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커스 보그의 생각은 전형적인 불트만을 닮았다. 실존 속에서 경험된 예수, 예수 사건이 실재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참되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가 분명한 역사적 토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커스 보그는 그 토대를 무너뜨릴 충분한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톰 라이트와 마커스 보그는 결론으로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배와 선교, 영성, 신학, 정치, 치유로 요약하며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의 통합, 유대인 메시아 예수와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예수 사이의 통합, 기독교인들의 서로 다른 경험들의 통합, 역사와 종말론의 통합, 역사와 신앙 사이의 통합을 주창한다. 반면 마커스 보그는 비판 이후적 소박함을 말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 비평과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성이 주인이던 시절을 통과하며 거쳐온 비판의 과정을 없던 것으로 되돌이킬 수는 없다. 비판적 사고는 마커스 보그가 설득하는 것처럼 새로운 이해를 낳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본래 전하고자 했던 본질로 되돌아 갈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껏 한번도 제대로 역사 비평의 시대를 겪어 보지 않은 우리 현실은 답답하기만 하다. 진리는 어떤 악의와 험담 속에서도 진리이다. 오히려 진흙탕 속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이 책의 서로 다른 두 주장들이 나란히 토론되어지는 모습처럼 우리 현실 속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것이 이 책 <예수의 의미>가 나에게 주는 최종적 도전이다.
위르겐 몰트만 / 한들출판사 / 1998년 4월
위르겐 몰트만. 희망의 신학이라 이름하는 20세기 신학의 거장. 그의 70회 생일을 맞아 내노라하는 동시대의 신학 거장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름만으로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대신학자들. 에베하르트 윙엘, 도로테 죌레, 요한 밥티스트 메츠, 엘리자베트 몰트만-벤델, 필립 포터, 한스 큉. 뭐라고 이름을 붙인들 그들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할 듯 싶다. 이들이 몰트만의 70회 생일에 모여 '나는 어떻게 변하였는가'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무엇이 자신들의 신학을 방향지었고,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으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한 사람씩 돌아가며 고백하였다. 이 세미나의 결과물이 바로 <나는 어떻게...>이다. 세미나에 나선 사람들 모두 한결같이 시대의 아픔, 그리고 그 아픔을 어떻게 짊어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통스러운 고민을 이야기한다.
윙엘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현존 사회주의의 몰락'이었다. 또한 반면에 스탈린주의 사회 안에서 자유를 말하여도 처벌받지 않는 장소로 카바레와 교회를 발견한 것이 그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 가운데 구체적으로 그 상황을 증언하는 이들에게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에 기대게 되었다. 몰트만은 공군 지원단의 일원으로 고사포 부대원이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의 동료들이 다 죽고 자신만 살게 되었다. 이날 밤에 처음으로 몰트만은 하나님에게 외쳤다.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들끓던 관심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가 몰트만을 동요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바르멘 신학선언을 초안하며 독일고백교회 운동을 이끌었다. 도로테 죌레 역시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지적한다. 어떻게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 어째서 그 이전의 신학과 똑같을 수 있는지 죌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고가르텐을 통해 개념을 바꾸는 용기와 다시 질문하는 법, 역설적으로 되묻는 법을 배웠다.
메츠 역시 아우슈비츠의 재앙으로 얼룩진 역사를, 어째서 신학이 그러한 재앙을 별로 쳐다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지에 깊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겪게 되었던 바닥공동체 생활이 그를 변화시켰다. 그라이나허는 월요일에 정치적인 사회에서 더 많은 정의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면 일요일에 강단에서 자유, 평등, 우애, 정의와 후원에 대해 설교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끊임없이 반추한 개념은 예언자에 관한 것이었다. 이 시대에 변함없이 예언자가 필요하며, 예언자적 운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지난 시대 속에서 끝나버린 역사가 아니다. 필립 포터 역시 그에게 주어진 현실의 상황-context-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해야 했다. 11살부터 식민 통치에 대해 반기를 들어야 했던 포터는 성서 본문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과 초대 교회의 역사, 여러 세기를 지나온 교회의 역사, 그리고 이 세계의 역사와 그 현실의 상황 안에서 다루어져야만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역사는 어떠한가?
근대사만 돌아보아도 외세의 식민지가 되어야 했다. 식민의 상태에서 일제에 부역하던 자들, 친일파는 지금도 사회의 지도층이다. 전쟁을 겪어야 했다. 곳곳에서 학살이 있었고, 말로 할 수 없는 참상들을 지금까지 꺼내 놓을 수도 없었다. 긴긴 독재의 세월이 있었다. 그리고 설핏 민주화되었다는 요즘. 그러나 우리의 신학은 근대사 내내 똑같았다. 식민 침략과 전쟁과 독재, 민주화에도 우리 신학은 변한 것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역사가 바뀌고 상황은 바뀌는데 그 지평은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아우슈비츠를 겪고 나서도 변함없는 그 신학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신학은 무엇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냉정하게 버림받고 있는 기독교. 나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
이안 브래들리 지음, 배규식 옮김 / 따님 / 1996년 3월
이 책의 원제는 <God is Green>이고, '환경주의적 성서해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녹색은 즉자적으로 자연을 떠올리게 한다. 생명이 있는 푸르름의 색깔이 녹색이다. 이 책은 하나님의 색깔, 혹은 하나님의 의미가 녹색이라고 선언한다. 지구상에 환경 운동이 출현한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생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갈수록 파괴되어가는 생태계와 지구 환경은 분명코 인간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팽배해 있을 무렵에야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발맞춰 신학에 있어서도 생태주의적 신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온 세계와 사람, 하나님이 한 몸이라고 주장으로부터, 인간은 자연을 지키는 청지기여야 한다는 소박한 의견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계속되어져서는 안될 환경의 파괴에 기독교계가 생태신학으로 대답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대답의 한 방법으로 환경주의적 성서해석을 제시한다.
모두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장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관심이라는 제목으로 이 땅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그의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음을 설명하며, 2장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 들판의 나무들이 기꺼이 즐거워하며 손뼉치는 무도임을 말한다.
3장에서는 자연계의 타락, 곧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타락하게 된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는 바울의 목소리를 제시하며 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4장에서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의 장엄한 의미들을 되살리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우주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의 고백 아래 인간 역시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릎꿇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결국 5장에서 인간의 역할은 어떤 위치가 되었든지 피조물을 잘 돌봐야 한다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 책은 성서에 대한 환경주의적 해석 말고도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성인들의 기도와 시를 인용한다. 바른 신앙은 균형을 갖추어야 하며,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현대에서야 등장하는 환경주의적인 성서 해석의 뿌리가 초기 기독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한국교회의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모습은 어떠한가? 건축물의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육면체의 교회 건물들 속에 푸르름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교회는 그저 사람들만의 구원을 위한 장소이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 역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만의 구원을 신봉하는 동안 우리 모두는 공멸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 성경을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은 성경에 대한 대단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환경주의적 성서해석 역시 그러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 사역 자체를 인간에게만 한정짓는 좁은 믿음의 소유자는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 환경주의적 성서 해석은 최소한 인간 중심 신학에 대한 반격이다. 성서를 축소하려는 개인주의적 신앙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우리에게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는 내세만 바라보는 영혼 구원론의 변경을 요구하는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 만물, 피조물들의 슬퍼하는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