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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오래 전에 사두었던 책을 이제서야 읽어보았다. 내 방에 함께 사는 동료가 추석에 집에 갔다 오면서 내 책을 스을쩍해서 먼저 읽은 것이 조금 마음에 남았는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의 책장에 내 책이 꽂혀 있었다. 얼른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간 남들 때묻은 책을 읽을 것 같아서...

책을 읽는 내내 이제 갖 접어든 30대라는 자리를 돌아보았다. 영혼의 사춘기 정도로 30대를 이야기하는 신경숙씨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20대 초중반에 가졌던 열정들과 믿음들이 무엇이었나에 대한 고민들이 꼬리를 문다. 작가가 겪었던 30대는 또 무엇이었을까?

출판사의 기획으로 출발한 공지영씨의 수도원 기행기가 이렇게 나와도 되는걸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들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 항복한 이야기들이며,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느끼는 여러 이야기들과 감정들이 이렇게 고스란히 들어있어도 될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수도원의 역사, 위치, 내력이 뭐가 중요한 것이겠는가? 수도원을 기행하는 사람이 그 안에서 새로움과 여러 느낌들을 받았다면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사는 거 별거 아냐, 사는데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아. 그러면 너만 자꾸 다쳐'에서 출발하는 그의 수도원 기행은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로 마치고 있다.

아르정탱을 거쳐 솔렘 수도원, 베네딕트 남자 봉쇄 수도원, 테제 공동체, 오뜨리브 수도원, 마그로지 여자 시토 봉쇄 수도회, 킴지의 수도원, 오스나 브뤽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 몽포뢰 수도원, 림부르크 수도원. 그가 거쳐간 이 수도원들이 한결같이 풍기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하나님의 자애로움으로 느껴졌다.

산사에 머리를 깍고 출가하는 스님들이 다 이 세상에 대한 상처와 아픔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어렸을 적 생각처럼 수도원에 들어가는 이들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봉쇄 수도원에서 평생을 기도와 노동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 갔다기 보다는 그 길까지 오도록 인도한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었으리라. 작가는 그렇게 썼다. 신께서 불러주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나를 쓰시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였다. 조용한 성당에 앉아 있다가 나는 알아버린 것이다. 그건 그저 그냥, 사랑이었다는 걸.

작가는 수도원 기행 내내 자신의 삶에 대해 자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항복한 것이 어째서 행복한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닌가 봐요, 이렇게 이렇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수가 있어요? 그러니 항복합니다. 절대자 앞에 삶을 내려 놓았을 때 밀려드는 행복감. 무거운 짐을 지고 그 앞에 나아갈 필요가 무엇이랴. 18년 동안 내내 무거운 짐을 고달펐다면, 이제는 자유하리라. 봉쇄 수도원 안에서 봉쇄된 그들이 자유로운 것처럼, 내 삶에 유폐된 채 우리도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는가? 현실에 대한 무너짐이 아니라, 내가 고집하던 것들과의 결별일 뿐이다.

혹여 죽어도 용서못할 사람이 있다면, 죽도록 누군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작가가 간 길들을 생각해 보시길. 쓰러지고 싶고, 삶을 그만 놔 버리고 싶었던 경험이 있다면 읽어보시길. 아마도 그들이, 봉쇄된 공간에서 외치는 이 소리가 귀가를 맴돌게 될 것이다. 'c'est un miracle!' (그것이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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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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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몰트만 지음, 김균진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2년 11월

교회와 신앙의 성령을 거부하고,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의 성령임을, 그리고 모든 것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에 대한 몰트만의 신앙과 입장을 상세히 논술한 책이다. 

몰트만은 책의 입문 부분에서 성령을 단지 ‘구원의 영’으로 파악하며, 그 장소는 교회이며, 이 성령은 인간에게 영혼의 영원한 축복을 확신시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 마음속의 믿음과 사랑의 사귐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동시키는 영의 경험은 자연히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 성령을 자연 속에서, 식물 속에서, 동물 속에서, 땅의 생태계 속에서 재발견하도록 한다고 설명한다. 성령의 사귐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기독교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의 보다 더 큰 사귐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이러한 성령님의 우주적 넓이에 대한 사고는 지금까지 교회의 영으로만 국한되어 왔던 생각과 부딪히기 때문에 거부감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몰트만의 해방신학에 대한 입장도 쉽게 기존 교회가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라고 생각된다. 몰트만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성서의 전승들이 제시하는 하나님 신앙과 자유의 의지를 결합하고자 하는 최초의 설득력 있는 시도라고 본다. 따라서 종교와 보수적 정치의 동맹이 주장하는 환상들과 가치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이냐 자유냐 하는 논쟁에 가장 중요한 지점은 이스라엘의 엑소더스 전승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전승이 교회의 중심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이다. 구라파에서 미국의 제도화된 교회와 평화 운동,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도교회와 민중교회의 갈등은 하나님과 자유 중에 하나를 택일하라는 근대적 사고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적으로 극복되어져야 한다. 몰트만의 주장에 많은 공감을 느끼면서도 몰트만(뿐만 아니라 바르트 등의 신정통주의자까지도)의 고민을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사고 내지는 기존 교회와의 불화를 만들어내는 신학사상으로 폄훼하는 데에는 수긍이 안 간다. 

몰트만은 입문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데, 다른 교파들을 적대자나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교파의 한계를 넘어서며 이 한계를 개방하는 것은 “성령의 사귐”으로 가능한 일이었다(17p)고 설명한다. 우리에게서 혹은 서로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한 오순절 교단과 정교회가 에큐메니칼 교회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루터 교회와 가톨릭이 칭의와 구원에 관한 교리 논쟁을 다시 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성령님의 사귀게 하시는 힘으로 가능한 일이리라. 필리오케에 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그것의 의미와 또한 제한점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바울과 요한의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이 주도적인 힘을 발휘한 결과이며, 공관복음서의 영 그리스도론의 진리가 이제는 합해져야 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몰트만은 기독교적 삶(vita christiana)은 언제나 그 시대와 관련되어 있으며 콘텍스트적이라고 말한다. 구원의 증언으로서 기독교적 증언은 ‘치료하면서’ 주어진 사회의 병들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구원자”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종교 개혁은 중세사회의 공적 병들에 대하여 작용했으며, 인격적 성화에 대한 감리교회의 증언은 영국의 초기 산업사회의 병들에 대하여 치료적이었다. 그렇다면, ‘후기 산업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지금, 이 과도기 속에서 ‘기독교적 삶’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 책 내내 몰트만은 생명의 영이 어떻게 우리와 관계하고 계시며, 어떻게 죽음과 파괴를 거부하시고 생명을 주시는지, 생동감을 주시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그러한 생명력은 단지 인간의 영적 구원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콘텍스트, 온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는 현재 속에 주어진다. 교회와 신앙의 성령이 아니라 온 피조물의 성령님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죽음을 거부하고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의 생동감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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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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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1년 7월

세수를 했더니, 얼굴에 까칠한 것들이 돋아난다. 피부가 안 좋은 탓에 건조한 겨울이 되면 늘상 겪는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밭은 어떠한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세수를 한 듯 한숨을 내쉬고 나면 감춰졌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두 숨을 쉬면 마음 밭은 깊은 고랑이 생겨나고, 세 숨을 내쉬면 마음 밭엔 풀들이 돋아난다. 

조연현 씨의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은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 볼만한 곳들을 소개하고 있다. 역사의 시계추는 이성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알던 시대를 건너 다시 영성의 문제에 관심 갖도록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마음의 문제는 곧 영성의 문제이고, 영성의 문제는 삶의 방식이 아닌 세계관에 관한 문제로 옮아간다.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며, 행동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이 세상은 충분히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17 군데의 영성 수련원들은 그러한 확신을 매듭지어 준다. 

이 책은 수련과 마음 수행의 방법들이 무척 다양하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종교도 다르고, 역사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조건 속에서 방법이 같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삶의 처지와 조건이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익혀진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마음에 있다는 것,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 주변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 수련이라는 것이 본래 자기의 마음에 집중하고, 개인적 삶을 성찰하는 것에 목표가 있기에, 부당하고 불의한 주변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역동적 실천을 가로막는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실은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깨장에 가면 파트너의 손으로 먹여 주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임을, 나는 너이고 너는 나임을 드러내는 실천적 행위로 서로 음식을 먹여 준다. 그 사람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속에도 이미 모두가 한 몸임을 알게 하는 힘이 있다. 깨장에 참여했던 유리 씨가 분노 때문에 운동했던 과거를 돌이켜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운동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처럼 마음 수련은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삶의 방식까지 변화시키게 된다. 

참선이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는 마음을 갈고 닦아 아무 것도 마음에 접근할 수 없는 경지를 가르쳐주고, 천도교 시천주수련을 통해서는 온 우주 만물에 빗대어 작디 작은 자아를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 자아 안의 시련과 번민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끝없이 마음 경계에 벌어지는 마음들의 투쟁을 조용히 바라봄으로써 마음의 번민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원불교 마음공부, '구나', '겠지', '감사'의 끝글자를 합친 나지사를 통해 마음과 화해하는 법을 알게하는 동사섭, 절대자와의 끊임없는 대화로 존재의 의미와 고통의 의미를 밝히는 영신 수련. 부루더 호프의 공동체적 삶.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글쓴이가 모든 수행에 직접 참가해 보았다는데 있다. 하나 하나 참가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바탕으로 그것의 의미를 찾아줌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책 뒷편에 수련에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적어두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게 해 놓았다. 마냥 이곳에 등장하는 단체들을 바라다보고만 있기엔 글들이 끌어당기는 힘이 너무 크다. 마음 속 풀들이 풀 밭을 만들기 전에 마음 밭을 다시 들여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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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間의 어울림/神學과 信仰  |  2008. 9. 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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