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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과정
12월 15일, 강사 오영숙

스타일의 이데올로기와 형식 분석

스타일이란 내러티브를 시각화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주류영화의 스타일로는 환영적 리얼리즘이나 고전적 헐리우드 패러다임 등을 들 수 있다. 고전적 헐리우드 스타일과 다른 스타일을 발견했을 때, 이것을 글로 옮기면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찾는 것이 비평에서 중요하다. 스타일은 차용하면서 스스로를 변형시킨다. 스타일 분석은 미학적 동기부여가 무엇인지 파악해 보는 것이다. 피터 그리너의 <요리사, 도둑....>에 보이는 눈에 튀는 무대가 무엇을 뜻하는지....

1. 영화 분석과 영화 형식의 역사
영화를 분석한다는 것은 영화를 하나의 맥락과 역사 속에 자리잡아주는 것, 영화 형식의 역사 속에 영화를 자리매김하는 것.
: 분석자는 영화를 형식의 발전 속에 놓고 볼 필요가 있다. 영화는 이전 작품들을 이어 받고 관찰하고 스며들고 인용하고 패러디하고 표절하고 우회하고 집약. 분석자는 영화 형식사에서 뚜렷한 특징을 보이는 몇 가지 경향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

2. 주류 미학의 사례 - 고전적 헐리우드 패러다임

▶ 영화와 리얼리즘

1. 고전적 헐리우드 스타일 : 이음매 없는 리얼리즘
- 환영적 리얼리즘
- 현실효과를 통해 자신을 신화화, 자연화하는 과정을 은폐

2. 미학적으로 동기부여된 리얼리즘
- 리얼리즘의 목적은 현실에 대한 하나 혹은 여러 개의 해독을 제공하는 데 있다.
- 리얼리즘 담론이 어떤 진실을 억압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어떤 진실을 생산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 궁극적으로 여러 다른 리얼리즘들이 존재한다. 다중성.
리얼리즘이란 주류 미학의 키워드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어떤 리얼리즘인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수식어가 붙어야만 한다. real이란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현실 효과 개념만도 매우 다양하다. 그냥 리얼리즘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무슨 리얼리즘인지 분명하게 해야 한다. 1910~40년대 헐리우드에서 정착하고 전세계적으로 규범화되었고, 연출을 배울 때 교과서적으로 배우는 규범 역할을 하는 것이 주류 리얼리즘일 것이다. 리얼리즘은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등과 대립해 왔고, 누벨바그, 네오리얼리즘, 독일 작가주의, 도그마 95 등도 주류의 반대쪽에 서 있다.
리얼리즘의 종류는 30년대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주관적 리얼리즘(60년대)
켄 로치 등의 키친 씽크 장르 -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기친 리얼리즘-페인트 리얼리즘
극사실주의 등등등이다.

▶ 환영적 리얼리즘 - 고전적 리얼리즘
대부분 눈에 띄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살린 것이다.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명함과 투명성을 간직. 그것이 생산되는 과정을 고도의 형식적 장치를 통해 숨기기 때문에 관객들은 스크린 위의 내용들이 객관적인 사실들을 중립적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특정한 관점에 의해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담아내었을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
어떤 영화든 독자적 스타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전통, 어떤 유파에 속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누구의 흐름을 이어 받았는지 알아야 한다. 바깥의 어떤 흐름이나 경향을 배제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그 작품 안으로만 갇혀 있는 비평은 굉장히 재미가 없다. 내러티브도 계열화 가능한 것들과 연관 지어서 이야기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환영적 리얼리즘은 다른 리얼리즘의 영역들을 계속해서 잠식하면서, 더욱 유연하게 발전해 왔다. 기존의 개념인 사회와 연관된 리얼리즘, 현실 내용이 중요한 것 대신에 이음매 없는 리얼리즘 곧 현실감을 살려내는 것이 중요해지게 되었다. 단지 현실효과를 지향한다.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ET처럼 허무맹랑한 내용이지만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음매 없음은 인위적인 공정들을 지워버리는 과정이다. 떨어져 있는 촬영, 장소, 시간 모두를 꿰매 놓고서 그 흔적을 지우는 것이다. 사실감, 강렬한 현실 효과가 봉합을 통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자연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만든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화화가 일어나는데, 신화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며, 어떻게 보여질 것인가에 목숨을 걸게 된다. 이 과정은 다양한 기술적 도움과 미장센 등을 통해서 일어나는데,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내러티브에서 인과성, 개연성이 갖춰지고, 이 내러티브는 효과적 시각 스타일을 통해 봉합된다. 여기에 필요한 도구들이 미장센, 카메라, 편집이다. 미장센은 화면의 배치에 관련되어 있다.

- 원근법
: 카메라 렌즈는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 체계와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생산(<기본적인 영화 장치의 이데올로기적 효과>)
: 중심화된 표상을 향한 욕망. 영화는 관객의 시점에서 세계를 조직하며 관객을 세계의 중심으로 설정.
: 미성숙한 자본주의의 산물
원근법은 위계와 중심을 정하는 것이다. 근대적인 시각법인데 바라보는 한 주체-단안-에 의해 소실점이 생긴다. 단안 원근법은 주체가 어디에 있는지 나타내며, 주체의 권력의지를 표현한다. 지배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중심화가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공간 배치에 위계가 생긴다. 피터 그리너의 <정원사 살인사건>을 보면 화가가 집을 그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눈에 보이는 것을 속속들이 다 파악한 듯하게 그려진다. 원근법은 욕망은 초기에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기 전에 자기 땅 주인이 가기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어서 등장했다. 바라보는 눈의 위치에서 점유하기를 원한 것이다. 소유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다.
회화에서 원근법은 사려져가고 다시 2차원적 영상으로 갔다. 카메라는 이 원근법을 단안적 이미지로 가장 손쉽게 표현해낸다. 원근법은 하나님을 벗어나 인간의 눈으로 내가 중심이 되어 획득한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바라보는 주체가 중요하다. positioning. 주체가 서 있는 위치에서 하나의 고정된 시각으로 점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시각을 배제한다. 타자를 만들어내는 양식으로 ‘근대’가 된다. 데카르트의 주체는 내가 생각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중심화이고, 나머지는 주변화된다. 영상 이미지는 관객을 중심에 놓고 다른 것을 배제시켜 나간다.
--> 이것들이 가져다주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바라보는 관객은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항상 어떤 위치- 영화가 전달하려는-에 놓여 있게 된다. 위치설정되는 것.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통해 관객의 생각, 세계관과 상관없이 폐적적인 내러티브와 내러티브가 시각화되는 방식을 통해 위치 설정되며, 어떤 특정한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 곧 호명된다. 텍스트의 효과에 의해 나도 모르게 불려진다. 후에 관객은 위치 설정을 거부할 수 있다는 논의가 일어난다. 인지주의는 관객의 능동성을 주장한다.

-> 바쟁 : 원근법은 신성한 공간에서 세속적 공간으로의 타락이며 원죄.
바쟁은 가톨릭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인간 주체의 힘, 시각 하나로 강요되는 것은 거만한 인간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현실에서 진짜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카메라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원근법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므로 타락 혹은 훼손이라고 보았다. 중심을 만들고 주변화하는 것을 배제하고 현실 덩어리를 보여주는 것이 가능하며 deep focus로 가능하다. 영화의 화면에서 중심은 포커스가 맞지만 대체로 주변은 포커스 아웃된다. 이것은 또 원근법의 한 표현인데, 딥 포커스를 통해 모든 초점을 맞춰 간다. 광각을 통해. 그러나 이런 장면은 어수선해 보인다. 쇼트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중심화된 것을 바로 보여주려 하는 것인데 바쟁은 이를 거부한다. deep focus에 long shot에 long take으로 편집을 극소화 하려 한다. 탈중심화된 공간, 탈중심에 대한 욕망이 있다. 롱 테이크와 롱샷은 예술가의 지표가 되다시피 했는데 허샤우시엔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관객은 이런 상황에서 더욱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주류는 어떤 위치에 가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함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이라고 느끼게 하는 오인을 불러 일으킨다.
타르코프스키는 바쟁의 적자라 할 수 있는데, 롱테이크를 통해 실체를 보여 주고자 한다. ‘나를 놓고 화면 속으로 들어가 진짜 현실을 보아라.’는 것이다. 이것을 네오리얼리즘이 이어 받았는데, 사실 돈이 없이 없어서^^...만들어진 조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나타내려 했다. 들뢰즈가 개념화할 때는 영토화(영역으로 제한, 내 땅)에서 탈영토화로 보았다. 유목민적 이미지이다. 코드화된 공간이 아니다. 홍상수 영화에서 중심이 비워져 있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채워진 화면을 볼 수 있다. 시민 케인 역시 탈 중심화하면서 주류로부터 탈피하려 했던 영화이다.

- 봉합과 정치 이론(Cinematic Apparatus Theory)
: 봉합은 라깡에서 비롯되었는데 주체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본래 통일체였다고 착각했던 때로 되돌아 가려는 것이다.
- 내러티브와 원근법의 관련성 : 들뢰즈. 원근법에 의한 공간의 정복은 내러티브 생성을 위한 통일적 코드와 관련
이 원근법은 내러티브에도 적용된다. 주체의 욕망에 따라 각각의 욕망들이 위계화되는 것이다. 이 주체의 욕망에 따라 다른 욕망들도 배제된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고, 투명하게 보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오인하는 것이다. 내가 부분을 볼 뿐인데, 전체를 보는 것처럼 본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내러티브에 하나의 중심이 없이 여러 개의 욕망이 공존한다면 관객은 견딜 수 없게 된다. 유연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원근법을 벗어나면 견디지 못한다.

- 선택을 숨기기, 중심화
: 모든 영화적 요소는 내러티브의 이해관계에 체계적으로 종속
: 제시와 혼란, 위기, 해결이라는 전통적인 리얼리스트 내러티브 패턴
: 설득력있고 균형감있게 구성된 미장센, 시공간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편집 등등
- 연속편집 : 영화는 다 연속 편집이다. 불가시편집이라고도 하는데, 편집한 것을 모르게 하기 때문이다. 편집의 흔적은 시공간의 연속이 깨지거나 모호할 때 내러티브와 동떨어진 숏이 생기게 된다. 편집에서 시공간적 연속성, 일관성이 중요하다. 내러티브가 이어지지 않고 끊길 때, 소리 없이 배경만 비출 때 편집이 깨지게 되는데, 컷은 대화나 서사의 논리적인 지점에 있어야 한다.
- 180도 규칙 / 30도 규칙 : 카메라의 경우 180도 규칙과 30도 규칙이 있다. 180도 규칙은 방향 감각 유지를 위해 촬영 때 180도의 가상선을 설정한다. 카메라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30도 규칙은 한번 촬영한 다음에는 30도 이상을 벗어나서 찍어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감이 깨진다. 몰입을 위해, 현실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규칙이다. 의도적으로 30도 규칙을 깨려는 노력을 볼 수 있는 것이 jump cut인데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데꾸빠쥬 : 동일시 효과를 극대화 하려는 것인데, 관객이 공간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헐리우드에서는 설정 숏(롱숏) -> 미디엄 -> 클로즈업을 거쳐 보여 준다. 브레송 같은 경우는 설정 숏을 절대 쓰지 않고 세부적인 것을 먼저 보여주는 특징을 보여준다.
- 샷/리버스 샷 : 대화하는 두 대상을 번갈아 가면서 찍는다. 봉합하기 위해 필요. 봉합은 관객을 영화로 넣어 버린다. 부재자의 흔적을 지워 버린다. 카메라가 놓여 있는, 본래 허구인 것을 알려주는 결핍이 있는데 이 결핍을 메우는 것, 혹은 없다고 믿게 하는 것이 샷/리버스 샷이다. 봉합의 대표적인 예로 환영을 지우며 또 하나의 환영을 만들어 낸다.
- 매치 컷

- 딥 포커스 : 딥 포커스는 편집을 극소화한다. 헐리우드는 스타를 클로즈업해서 동일시 해야 하기 때문에 딥 포커스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딥 포커스는 한편으로 형식미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다.
- 몽타쥬 : 에이젼슈타인이 1920년대 내놓았다. 연속 편집과의 대립하며 시공간적, 내러티브적 연속성을 수용하지 못 했다. 부르조아적이지 않은 것을 찾았는데, 사회주의는 중심화가 아니라 집단화이다. 정반합의 역사 발전이 중요하다. 숏을 연결할 때 연속성을 무시하고 충돌이라고 생각했다. 숏의 크기나 내용 등이 부딪히게 했다. 왜 편집이 그렇게 됐는지 이해하기 위해, 연결 고리를 관객이 찾아가야만 하도록 했다. 연속성이 있을 때 영화를 따라 가기만 하면 되지만, 몽타주는 왜 했는지 생각하도록 한다. 이것은 또한 주어진 코드를 해석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대단히 인위적이다. 수동적인 작업일 수 있다.

주류영화에 의도적으로 싸우기 위해 등장한 영화를 대항영화(counter cinema)라 할 수 있는데 고전적 리얼리즘 영화의 이데올로기를 탈피하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투항하고 있다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나의 정체성은 대중문화를 통해 형성한다. 이것은 예전에 공동체 틀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주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을 거부하고 하는 흐름이 피터 울른에서 볼 수 있다.

3. 주류의 외부

1) 피터 울른 : 주류영화의 전형인 고전의 리얼리즘에의 대립이라는 입장에서 대항영화를 정의. 그들의 차이는
① 내러티브의 연속성 vs 불연속성
② 동일시 vs 거리화
③ 투명성 vs 전경화 : 주류는 투명하게 없는 것처럼 보여 주지만, 전경화란 봉합되어 있는 4번째 면을 거꾸로 보여 준다. 이것은 영화의 공정을 전면에 드러내게 한다.
- 히치콕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감독 등이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도 전경화라 할 수 있다. - 고다르 영화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배우들도 전경화
- <퍼니게임>에서는 끊임없이 카메라를 의식하게 한다.
- 부재자를 의식하게 함.
- 전경화는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한다. <완령옥>에서 배우의 삶을 극화해서 보여주는데, 완령옥과 감독-스텝들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 준다.
④ 간단한 디제시스 vs 다중적 디제시스
⑤ 닫힘 vs 열림 : 내러티브에서 주류는 완결적인 닫힘을 지향한다. 종결의 의지 자체가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⑥ 쾌락 vs 불쾌 : 관객은 동일시를 통해 쾌락을 느낀다. 이에 반해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를 읽는 쾌락이 있을 수 있다고 반문한다.
⑦ 허구 vs 현실

▶ 주류 영화가 지워버린 것들을 보여주는 작업들. 지배적인 영화의 언어가 결코 유용한 유일한 언어가 아님을 보여주고, 영화적 담론을 문제화함으로써 현실 자체가 그들의 이미지를 통해 말한다는 주류 영화의 가정들에 도전.

2) 현대영화의 제 특징
- 보다 느슨하고 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덜 극적이고 비약과 빈틈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때때로 열려 있고 모호한 결말들을 포함하는 이야기를.
-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 않고 종종 위기에 처해 있고(남여의 위기, 심리적 위기) 그다지 행동으로 향하지 않는 인물들.
- 인물이나 작가의 주관성과 보여지는 것의 객관성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시각적, 음성적 장치
- 작가들 저마다의 양식적 특징들과 이야기와 인물들에 대한 시선의 강한 현전
- 영화 자신에 관해 말하려는 ‘자기 반영 reflexivities'적 성향

4. 분석도구들

1) 숏의 구성요소
- 지속 시간
- 촬영 각도
- 정지된 카메라 / 카메라의 움직임
- 규모, 축도(찍는 대상과 카메라의 거리)
- 위치 조절(파인더의 테두리 안에 피사체를 잡아 놓기)
- 시야 심도
- 한 숏의 몽타주와 영화 전체 안에서의 정황 : 언제? 어디서? 무엇과 무엇 사이? 등
- 영상의 선명도

2) 시퀀스의 의미와 유형 : 공간이나 사건 단위에 따른 하나의 서사 단위를 구성하는 숏들의 모임
- 실제적 시간의 신이나 시퀀스 : 이야기의 지속 시간과 영사의 시간 거리가 일치
- 일반적 시퀀스 : 다소 중요한 시간적 생략을 포함. 연대기적 일관성
- 교차 시퀀스 : 동시에 일어나는 둘 이상의 사건
- 평행 시퀀스 : 뚜렷한 연대기적 연결 없이 두 가지 이상의 사물들의 질서(사건, 대상, 풍경, 행위 등)를 보여주어 하나의 비유 같은 것을 만든다.
- 에피소드별 시퀀스 : 어떤 중요한 기간에 걸쳐 일어나는 하나의 변화 과정이 몇 가지 특징적인 숏들로 생략된 채 나뉘어 나타나난다.
- 삽입 시퀀스 : 가령 전쟁 같은 동일한 질서의 사건을 나타내는 몇몇 숏들의 몽타쥬

① 시퀀스들의 수와 지속 시간 : 영화 전체나 몇 부분이 잘게 분할된 것과 별로 나뉘어 있지 않은 것
② 시퀀스들의 연결 : 빠른가, 느린가. 컷에 의하는가. 수사적 구별(오버랩, 음악과 소리에 의한 연결 등)을 쓰는가. 연속적인가, 아닌가.
③ 영화 내적, 시퀀스 내적 리듬 : 빠른가, 느린가. 딱딱한가, 부드러운가. 연속되어 있는가, 아닌가. 등등

3) 시점 내지 듣기의 중심
- 시점의 세 방식
① 전적으로 ‘시각적’인 의미에서의 시점 - 보이는 것을 어디로부터 보는가? 영상은 어디서 찍히는가? 카메라는 어디에 놓는가?
② 서사적 의미에서의 시점 : 누가 이야기를 하는가? 누구의 시점에서 이야기되는가? 이 시점을 포착될 수 있는가, 없는가?
③ 이데올로기적 의미에서의 시점 : 인물들이나 이야기되는 스토리에 대한 영화(작가)의 시점은 어떠한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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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  |  2008. 7. 25.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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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신학대학 특강 자료 데리다의 철학사상

김 형 효(精文硏 교수. 철학)

I. 책(le livre=book)과 텍스트(le texte=text)의 구분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그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거장이다. 그의 철학을 보통 해체주의(déconstructionism)라고 부른다. 왜 해체적인가? 기존의 서양철학사의 진리관과 형이상학을 해체시켜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은 독일의 하이데거(Heidegger)의 사유와 유사하나 본인은 하이데거도 해체적 비판의 대열에 올려 놓고 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서양의 기존 철학을 해체하려한 공적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존재론적 사유를 청소하지 못하고 거기에 연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사유가 데리다보다 서양 전통철학을 해체하는 사유의 길을 먼저 걸어 갔을 뿐만 아니라, 데리다가 자기의 철학의 특성으로 말하는 差延(la différnace=differance)의 발상법도 하이데거가 이미 말해 놓은 差延(der Unter-Schied=differance)의 길을 답습한 느낌을 주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데리다가 해체하려한 그런 서구의 전통철학의 존재신학론(l'onto-théologie)과 다르므로 데리다의 하이데거 존재론의 비판은 정당한 것 같지가 않다.
그러나 데리다의 철학이 하이데거의 사유와 같은 뉘앙스를 매양 풍기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와 하이데거를 갈라 놓는 가장 큰 차이점은 데리다의 철학이 철두철미 존재론(l'ontologie)을 부정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존재론을 부정하는 사유로 가득차 있기에 그의 철학이 하이데거처럼 存在와 無를 철학적 화두로 삼고 있지 않다. 데리다가 모든 존재론을 존재신학이라고 명명하면서 그것을 지우려고 하는데, 이 反존재-신학적 사유도 이미 하이데거가 시작하였던 작업이었다. 데리다는 존재의 개념을 영원한 現存의 진리와 그 형이상학의 아성으로 봐서 그것을 해체하려고 하는데 반하여, 하이데거는 존재를 데리다처럼 현존의 초시간적 실체적 성역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反존재론적 철학은 하이데거의 사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오독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의미는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서의 현존(la présence=presence)이 아니라, 생멸을 나타내는 사건(das Ereignis=event)이거나 생기적 事象(die Sache=state of affairs)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데리다 철학의 해체작업은 세상을 존재신학의 의미로 가득 채우려는 형이상학의 해체작업을 뜻한다. 존재신학은 이 세상이 신에 의하여 창조된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사상을 말한다. 즉 이 세상은 의미의 창조자로서의 최초의 원인이자 마지막의 목적인 신의 현존적 존재에로 통일되고 귀결된다는 사상이 바로 존재신학의 기본이다. 즉 존재신학은 神中心主義의 사상으로서, 이 세상은 神이 쓴 책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신이 작성한 의미의 기승전결의 이야기로서의 역사라는 것이다. 신이 중심이고 이 우주의 중심은 하나이므로 신을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은 강력한 일원론적인 존재신학의 대명사와 같다. 데리다의 철학은 일원론적인 신학적 세계관의 부정일 뿐만 아니라, 그 일원론적 신학적 세계관에 짓눌린 세상을 해방시키려는 의도를 풍기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신의 현존을 지우고 레비나스(Levinas)의 영향으로 오히려 신의 不在(l'absence=absence)를 자유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신중심주의의 거부는 인간중심주의의 해체와 연결되고, 이것은 또 자아의식의 지우기와 상관적이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자아철학과 의식철학의 종말을 유도한다. 신중심주의는 자아중심주의와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고, 그 자아중심주의는 의식의 각성과 그 의미화에 집착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아의 보편적인 각성은 하나님의 생각과 등식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그런 유아주의를 불러 일으킨다. 존재신학적 철학은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일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아를 논리적 보편의식으로 무장한다. 그러나 겉으로 논리적 보편으로 무장해도, 그 보편은 자아의식을 만인의식으로 도호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와 자아중심주의는 다 열광주의(fanaticism)에 탐익하는 위험성을 지닌다.
세상이 神이 저술한 책이라면, 그 책의 내용은 神의 진리가 백과사전식으로 다 담긴 완벽한 전체적 체계임에 틀림없으리라. 존재신학적 철학의 정상에 속하는 헤겔(Hegel)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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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  |  2008. 7. 2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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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1. 24
영화비평과정 2강
“한국영화비평의 경향” - 작가주의 비평을 중심으로

1. 작가주의 비평 : 텍스트와 감독

1) 작가주의란 무엇인가?
2) 작가주의 비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작가라는 개념이 대중적인 개념이지만 사실 복잡한 이론이다. 서양에서 작가와 한국에서 작가 개념은 다른 문화적 배경 속에 놓여 있다. 한국에서 이 개념이 시작된 것은 “하길종
” 감독이라 할 수 있다. 하길종 감독에 관해서는 70년 대 신화화된 측면도 있지만 굉장히 중요한 감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엄밀하게 서양적 맥락에서 작가 개념을 사용했다. 물론 작가 정책, 작가 이론인지 판단해 볼 필요는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작가 개념이 본격화되었다. 작가주의란 단순하게 말해서 ‘예술가’라는 개념인데, 본래 영화는 상업적 측면이 강하고 초기 영화는 영화가 왜 예술인지를 증명하는데 집중했다. 여기에 작가주의가 공헌한 측면도 있다. 서양적 의미에서 작가는 영화가 ‘글 쓰기’라는 주장을 담고 있다. 글 쓰는 것은 감독이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고 이것은 영화 자체가 자율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기존의 영화들은 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TV 드라마를 작가가 장악하는 것처럼 시스템 안에서도 감독이 영화를 장악하고 자율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1950년대 프랑스 프랑수아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란 글에서 비롯된 작가 정책은 당시의 시나리오와 문학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시적 리얼리즘 영화로부터 독립하는 것이었다. (1940년대 필름 느와르라고 불리는 장르는 비평가들이 발명해낸 개념이다. 1940년대 미국 영화에 한 경향인데, 시적 리얼리즘과 비슷하다.)
트뤼포는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장센’에 주목했다. 화면의 구도, 사물의 배치 관계를 나타내는데 특히 미장센이라는 시각성을 강조했다. 감독이 작가라면 시나리오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장센을 통해 자기의 것,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작가와 장인, 작가와 감독을 구별해낸다. 작가의 기준은 고유한 자신의 색깔과 세계관을 가졌는가이다.

작가주의는 영화의 의미를 작가에 두는데, 낭만주의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이 강조된다. 때때로 작가주의 비평이 많이 도전받지만 지금까지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왔다. 후기 구조주의
에서 작가의 죽음을 선포하기도 하지만 후기 구조주의 자체도 작가주의 작품을 그 비평 대상을 삼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주의 비평의 목적 중에 하나는 작가를 발굴해 내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명세 감독이 <개그맨>으로 데뷔했을 때 이명세 감독을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스타일이 남다르다는 것을 작가주의 비평을 통해 발굴해냈다. 미국 할리우드 시스템에서도 산업의 압력을 뛰어넘어 감독의 색깔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과정은 사실 전투적이고 정치적인 작업이다. 미지의 감독을 발굴해내고, 그 근거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일관된 스타일과 색깔 등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존 포드, 샘 풀러
같은 감독들이 발굴되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임권택 감독과 이두용 감독을 예를 들 수 있는데, 임권택은 뜨고, 이두용은 졌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작가주의의 병폐라고 할 수 있다. 이두용의 <뽕>은 비범하고 탁월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거의 모든 비평은 작가주의 비평이다.

3) 작가주의와 장르 비평의 관계

이 둘은 굉장히 큰 유사성이 있다. 장르영화는 비슷한 영화들을 분류해 주는 개념인데, 유사한 것이 반복되려면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할리우드 시스템이 대표적인데, 이 시스템은 제작, 배급, 상영을 모두 아우르는 상업적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통해 표준화, 분업화, 전문화를 이루었고, 서부 영화들처럼 영화가 표준화되었다.
작가주의를 강조하다 보면 이 상업적 측면, 시스템의 문제가 완전히 무시될 수도 있다. 시스템과 장르적인 부분들이 어떻게 대화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르적 시스템 안에서, 여러 코드들을 통해 새로운 영화들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장르·관습적 표현들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순수하게 장르비평을 하겠다는 경우는 시네마적인 것을 통해 장르적 특성을 파악한다. 아이콘(특정 장르적 사물들), 관습, 공식(특정한 이야기 구조)들을 통해서. 작가주의는 원맨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장르는 텍스트와 산업과 관객들 모두를 순환하는 구조이다. 단순한 영화 분류라고만 할 수 없다. 산업은 텍스트를 비틀기도 하고, 관객은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 작가주의의 부정적인 점은 모든 작가주의 작품은 좋은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 개념에 이미 가치 평가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신중할 필요가 있다.

5) 한국의 작가주의 - 하길종에서 현재까지, 한국 작가주의의 특이성

한국의 작가주의는 하길종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이어지다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강세를 보였다. 이 시기 이전에 영화주의와 사회운동적 개념으로써 영화라는 두 흐름이 있었다. 영화주의는 키노라든지 서울시네마테크 계열로 작가개념을 서양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영화적인 것에서 작가주의를 주장한다. 영화주의는 영화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고 할 수도 있다. 사회운동의 개념으로써 영화를 추구하는 흐름은 리얼리즘적 측면에서 사회 비판 기능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의식이 있는 감독을 작가로 대우한다. 두 흐름은 그런 방식으로 작가주의라는 개념에서 만나게 된다.
서구의 작가 개념이 예술가 개념이 강하다면, 한국에서는 이것과는 많이 다르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한국 영화를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충무로 시스템도 주먹구구 식이었고, ‘주먹’에 의해 영화사가 운영되기도 한다. 한국 영화를 누구도 예술로 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영화도 예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임권택’을 발굴했다. 임권택은 영화주의 흐름에서, 이장호, 배창호 감독은 리얼리즘 측면이 결합되면서 ‘의식 있는’ 사회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스타일이 무엇이냐 연구했다. 한국 뉴웨이브 시네마라 할 수 있는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등도 다른 감독들과 차별화된다. 비평의 방법론들 역시 감독들의 고유한 스타일과 세계관을 찾으려 했다.

2. 리얼리즘 비평: 텍스트와 콘텍스트

1) 한국영화에서 리얼리즘과 작가의 공모성
* 영화에서 리얼리즘의 문제

2) 리얼리즘과 멜로드라마적 상상력
* 멜로드라마
: 표면과 깊이의 문제

90년대 중반 이후로 최근 새롭게 등장한 감독들 : 홍상수, 박찬욱, 김기덕 등은 예전과 다른 새로운 경향이 있다.
예전에는 멜로드라마적 경향, 세계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멜로드라마는 melody와 drama가 합해진 것으로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자극해서 울려야 했다. 이런 장르를 Body Genre라 하는데, 공포와 멜로가 있다. 이 장르들은 신체적인 반응을 유도하고 둘 다 카타르시스를 유도한다. 특히 공포 영화들은 억압된 것에서 귀환과 금기를 넘어서는 것에 집중한다. 또한 개인과 집단의 문제를 제기하고 싸구려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멜로드라마는 억압된 것의 세계 속에서 이것을 뛰어 넘으려는 표현이다. 숨겨진 것은 뒤틀려져서 드러나기 마련이기, 한국 사회 속에서 억압되고 이것을 드러내려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전환 히스테리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것은 억눌린 욕망들이 한계를 넘어설 때 다른 것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멜로드라마가 리얼리즘과 관계를 맺는 것은 전환 히스테리를 표현하는 부분이다. 표현할 수 없는 금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굉장히 과장되어 있다. 시도 때도 없는 음악, 과장된 대사와 음악, 앵글 들. 이런 과장들은 뭔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별들에게 물어봐>에서 경하는 순결이데올로기와 사회 모순의 이중적 병폐 속에 놓여 있다. 남성들의 욕망은 내러티브를 통해 허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 한국 작가주의 비평이 있다. 사회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파악한다. 장선우 <성공시대>를 통해 사회 모순을 고발한다. 초기 이장호에게서 리얼리즘을 더욱 강하게 발견할 수 있다.
현재 90년대 중반 이후에 이르러서는 또 다르다. 장선우 감독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이후 몰락하고 있는데, 계속 작업하기가 힘들다. 상업적 측면에서 보면 감독들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금방 도달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고, 기획과 배급만 잘 되면 되기 때문에 ‘감독’이 덜 중요하게 되었다. 장선우 감독이 나름대로 다양한 흐름을 가지고 있고, 박광수는 이에 비해 일관성을 지닌다. 이 후의 봉준호나 장준환, 박찬욱 감독들은 더 이상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을 가지지 않는다. 영화를 통해 세계를 보는 영화광 세대이고, 뛰어난 영화 언어를 사용한다. 알레고리와 아이러니 (비틀기, 풍자)에 능하다. 여균동
의 <세상 밖으로>를 보면 이것을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판한 것으로(리얼리즘적으로) 보기 보다는 영화 속 세계를 그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혜진이 계속 ‘내일을 향햐 쏴라’를 인용하는 모습들을 보면 결국 세상 밖으로는 영화 속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3. 현대한국영화의 작가주의
- 작가주의와 구별 짓기의 문제
- 탈리얼리즘? : 알레고리, 아이러니적 상상력
- 작가적 경향의 변화?
- 홍상수의 사례
- 박찬욱의 사례


작가주의는 끊임없이 구별 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작가는 테오로 앙겔로포스나 에밀 쿠스타리차 정도일 것이다. 작가가 표현하는 것은 치열한 작업이었는데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것이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더 이상 작가가 존재할 자리를 없애버린다.
박찬욱 감독은 스스로 구별 짓기 전략을 구사한다. 대중문화적 자원들을 강력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지구를 지켜라>, <복수는 나의 것> 이 둘이 비슷하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며 냉소적이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영화 형식에 대한 유희에만 능하다. <올드보이>가 칸에서 상 받은 이유를 사실 잘 모르겠는데, 영화 형식에 유희 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 새로운 감독들이 어떤 형태로 다른 장르 영화들과 구별 지을까 고민하며, 작가주의 비평가들의 문제 역시 감독들의 구별 짓기 전략에 편승한다는 점이다.
작가주의의 공과는 보면, 먼저 공적은 관객들과 감독들의 의식 변화를 주도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적 실천을 지향했고, 한국 영화의 구조를 비판할 수 있는 틀을 제시했다. 반면 과오라고 한다면 비평 속에서 특정한 감독들만 내세웠고 작가주의 비평으로 좌절하는 감독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뉴 저먼 시네마에서도 ‘작가’를 강조하다가 독일의 영화 토대가 무너진 것을 볼 수 있다. 비평 행위가 기능을 하는데 어떻게 기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작가주의 비평을 가치 평가 잣대로만 사용해서는 안 된다. 현재는 작가주의 비평이 상업적 측면에 매몰되어 있다. 작가가 곧 brand화 된 것이다. 어떤 판타지를 만들고 있다.



* 작가주의
작가주의와 장르이론은 가장 영화적이고 영화 내부적인 비평 방식이다. 작가주의 작가란 1920년대 무성 영화 시대의 프랑스 영화 비평가들과 영화감독들에게 연원을 둔 용어이다 그 당시에 작가 주도(대본의 저자와 영화 감독이동일인인 경우) 대 시나리오 주도형의 영화(대본이 감독이 아닌 다른 작가나 시나리오 작가에 의해 쓰여진 경우)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고급예술 /저급 예술의 논쟁을 재연하고 있다. 1950년 이후 이 논쟁은 새로 창간된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ema)(1951)에 의해 다시 채택되어 통속화되는데, 이제는 고급 예술/저급 예술의 논쟁을 해소하는 효과를 갖는다. 지금도 발간되는 이 잡지는 영화 비평가 앙드레 바쟁에 의해 주도되었고 카이에 그룹으로 알려진 일단의 비평가 집단이 주요 필자였다. 이 집단은 1920년대 이론가들의 사고(-> 아방가르드)를 따르지 않았다. 이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부정했다. 이들이 편 논지는 영화 이론에까지 격상하게 된다. 카이에의 작가 정책에 대한 논의를 통해(즉, 작가주의의 개념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을 통해) 이 집단은 작가의 개념을 미장센의 개념과 깊게 연결시킴으로써 이를 발전시켰다. 작가의 의미에 있어서 이러한 전이는 이 집단이 미국/할리우드 영화에 기울인 열광적 주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점령 상태에 있던 프랑스에는 미국 영화 상영이 금지되었다. 전쟁 이후 갑자기 그 동안 상영되지 못했던 수백 편의 영화들이 프랑스 극장가를 점거하게 된다.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존 포드, 샘 풀러 같은 감독들이 만든 영화는 대단히 신선한 것으로 비쳤고 카이에 그룹으로 하여금 할리우드 제작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 감독들이 숏 연출 이외의 제작 과정에는 거의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 작가의 지위를 얻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미장센에서 볼 수 있듯이 스타일 또한 작가를 구획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카이에 그룹 덕택에 작가라는 용어는 미장센을 통해 감독을 식별할 수 있는 스타일을 지칭하거나 아니면 감독의 날인이 완성된 영화뿐 아니라 대본/시나리오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그러한 영화 제작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이런 두 번째 형태의 작가주의(총체적 작가)의 전형적인 예로 프랑스에서는 장 비고, 장 르느와르, 장 뤽 고다르, 아그네스 바르다, 독일에서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빔 벤더스, 마르가르테 폰 트로타, 미국에서는 오슨 웰스, 데이비드 린치 등이 꼽힌다. 어떤 영화감독들은(대부분 미장센형식의 작가였다) 이 용어 이전에 주로 활동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카이에 그룹에 의해 이 레이블이 붙여졌다(예를 들어 혹스, 포드, 풀러, 히치콕 등 주로 미국 감독들이었다).작가 정책은 카이에 그룹에 의해 그들이 좋아하는 감독들을 정전canon의 자리에 승격시키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이 보기에 동맥 경화증에 걸리고 화석화된 당시의 프랑스 영화를 공격하기 위해서도 채택되었다. 이를 아버지의 영화le cinema de papa라고 부른 이들은 이 영화들이 대본 위주이고 안전한 심리학에 안주하며 사회적 리얼리즘을 결여하고 있으며 이미 시효가 지난 시나리오 작가들과 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프랑수아 트뤼포는 가장 집요하게 이 같은 비판을 했다). 이 유사 오이디푸스적인 논전은 저자/작가의 우위성을 확립했고 다소 낭만적인 보수적 미학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50년대 프랑스의 격렬한 정치적 열기를 감안할 때 이 집단의 글들은 놀랄 만큼 비정치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이들의 보수적인 입장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있어 또 다른 문제는 작가를 특권화 함으로써 맥락(즉, 역사)을 지워버리게 되고 따라서 이데올로기 문제를 빗겨 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형식적, 스타일적, 주제적 구조에 따라 보게 됨에 따라 보이지 않는 구조(가령 감독과 배우 간의 보이지 않는 역학이나 산업과 관련된 경제적 압력 등)가 배제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중에 영화를 만들게 되는 카이에 그룹의 필자 가운데 트뤼포의 작업이 작가 정책의 보수적이고 낭만적인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는 반면 고다르는 (다른 것 중에도) 작가주의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작가 정책은 1980년대까지 지속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작가는 지금도 널리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것의 본래적인 보수주의를 감안할 때 우리는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얼다. 첫 번째 대답은 그것이 1950년대까지 주로 사회학적 분석에 기초하고 있던 영화 이론의 개념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대답은 이 논쟁이 단일한 영화 이론을 제공하려 했던 시도가 제대로 관철될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 사실상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중적인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결국에는 드러냈다는 점이다.


다음은 세 가지의 국면을 통해 작가 이론의 발전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Andrew, 1984; Caughie, 1981; Cook 1985; Lapsley & Westlake,1988을 보라). 이 세 국면은 다음과 같이 도해해 볼 수 있다.
국면 1: 1950년대 작가정책 [작가 : 중심적 역할, 의미의 생산자] 작가 외 다른 것은 없다. 그러면 관객, 이데올로기, 컨텍스트는 어디 있는가?
국면 2: 1960년대 구조주의 [구조들 : 작가, 언어학적, 사회적, 제도적 의미를 생산하는 모든 것 ] 텍스트에 잠재하는 구조들이지만 여전히 관객이나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찾아볼 수 없다.
텍스트/이데올로기
국면 3: 1970년대 포스트 구조주의 작가 - [기호학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해체 ] - 관객
컨텍스트/상호택스트성
텍스트와 주체들이 무엇을 행하고 그들의 상호 작용이 어떻게 의미를 생산하는지 보여 주는 매개 변수들을 설정하게 하는 패러다임.

'작가 이론'이란 용어는 1960년대에 미국의 비평가 앤드루 새리스의 오역에서 근원한 말이다. 단지 논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격상되어 버린 것이다. 새리스는 미국/할리우드 영화를 '유일하게 좋은 영화'로 끌어올린다는 민족주의적이고 쇼비니즘적인 목적으로 작가주의를 이용했다. 하지만 유럽의 아트 시네마는 거론할 만한작품이 한두 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다루었다. 이러한 잘못된 용어 사용의 결과로 영화는 '좋은' 영화 혹은 '위대한' 감독이 만든 정전과 그렇지 않는 것들로 크게 나뉘게 되었다. 이것이 영화 강좌와 영화 연구 일반에 미친 영향은 만만치 않은데, 흔히 좋은 혹은 위대한 영화로 판단되는 것만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다행히 197O년대 후반 문화 연구가 영화 연구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이 불균형이 다소 개선되었고 영화 이론도 전반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에 새로이 등장한 구조주의의 영향이란 관점에서 이 논쟁이 다시 재현된다.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작가주의에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재고하고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영국의 영화 잡지 <무비 movie)는 논쟁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하나의 개념으로서 구조주의는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이론은 1950년대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에 의해 채택되어 조명을 받기 전에는 - 특히, 그의 대중적인 에세이인 <신화론 Mythologies>(1957)에서 -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다. 소쉬르는 그의 <일반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ique generale>에서 모든 언어를 질서화 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랑그/파롤의 패러다임은 언어 혹은 언어 체계의 심원한 보편적 구조(랑그 langue) 및 그것의 여러 다른 문화에서의 현현(파롤parole)에 대해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변호하는 기능으로서 의도된 것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1960년데 인류학적 구조주의(인디언들의 신화에 대한 연구)도 내러티브 구조에 치중한 것이긴 했지만 유사 선상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레비스트로스의 논지는 모든 인간 문화는 인간 두뇌의 산물이므로 그것의 표면 밑에는 어딘가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1960년대에 프랑스에서 대단히 인기를 얻은 접근 방법이었다. 루이 알튀세르는 바르트와 레비스트로스가 세워 놓은 흐름을 따르면서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에 이를 도입했고 자크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한 글에서 이를 도입했다. 프랑스에서의 이러한 구조주의의 통속화의 근원은 사회 정치적 맥락이며, 이는 구조주의의 총체 이론으로서 의 전략과 관련된다. 구조주의의 통속화는 1958년 샤를 드 골의 대통령 복귀와 일치한다. 그의 민족적 통일성에 대한 호소(알제리 위기를 앞에 두고),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경제 성장 및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은 프랑스에민족적 일체감을 부여하기 위해서 어떤 구조가 필요하다는 욕망을 징후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조주의에 의해 예증되는 총체적 구조에 대한 욕망은 1960년대에 다가올 정치적 불안정에 대처하려는 노력으로 읽을 수 있다. 1960년대에 이러한 영화 이론의 '재고'가 (1950년대에 그러했던 것처럼)영화 비평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 특히 구조 언어학과기호학을 경유했다는 것은 강조할 가치가 있다. 이 패턴은 1910년대에는 정신 분석학과 철학이, 그리고 1980년대에는 역사가 그럴게 논의를 밀고나간다는 점에서 그 자신을 반복하게 된다. 에세이스트들과 철학자들이자신의 이론을 영화에 적용하려는 새로운 경향이 갖는 중요성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들 작업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단순히 해석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작업이 학문으로서의 영화 연구를 정당화하고 영화를 학문 영역의 한 분야로 굳히게 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구조주의는 작가주의의 주창자들에 의해 열정적으로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구조주의의 과학적 접근 방법이 작가 이론의 낭만적 주관성에 대해보다 객관적 토대를 제공해 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주의에 과학적 정당성을 줄 수 있다는 잠재성 이외에 총체적 이론을 수립하려는 구조주의의 잠재적 전략 때문에 영화 이론에는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비쳤다.

영화 이론이 갖는 이 같은 질서에 대한 욕구란 점에서 징후적인 것은 소쉬르적인 기호학의 틀 안에 영화를 위치시키려는 크리스티앙 메츠의 (1960년대 중반의) 작업이었다. 기호학자인 메츠는 <영화에 있어 의미 작용에 관한 시론 Essais sur la sigification au cinema>에서 거대 통합체 grande syntgmatique의 형식으로 총체 이론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영화가 총체적 구조를 지닌다고 믿었다. 소쉬르적 용어를 채택하기 위해 그는 시네마 cinema를 랑그로 보았으며 개별적인 영화 film를 파롤이라 보았다. 그의 노력은 -영화 언어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혀내고 영화 기호학의 토대를 수립하려는 - 그러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적 이론이 갖는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론이 텍스트를 규정하고 결국 텍스트의 다른 요소를 몰아내는 것 말이다. 쾌락과 관객 수용의 문제는 결여되며, 대신에 발생하는 것은 이론적 틀의 무게에 의한 미학적 경험의 소멸이다. 이것은 구조주의가 영화 이론과 작가주의에 관한 논쟁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발전을 가져왔다. (새리스 유형의) 작가 구조주의는 작가 이론에 대단히 큰 긍정적 변화를 가져왔다. 영국의 <무비>는 영화와 관련해 명백히 낭만적 미학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이들은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 낸 것이다. 작가를 의미를 생산하는 여러 차원 가운데 - 장르나 영화 산업 같은 개념들 - 하나로 위치시킴으로써 작가 이론은 보다 신축적인 것이 될 수 있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 또한 작가성의 낭만적 개념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작가는 통일된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이 아니며 텍스트로서의 영화는 '긴장, 침묵 그리고 억압의 유희이기' 때문이다(Caughie, 1981: 128). 그리하여 작가는 연구의 중심에서 벗어나 이제 영화 텍스트를 구성하는 여러 다른 구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전치displacement는 다른 구조가 대두될 수 있도록 했는데, 가령 언어학적, 사회적, 제도적 구조들이 등장했고 작가가 이들 과 맺는 관계도 중요시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작가의 구조가 주요한 것으로 취급되긴 했지만 스튜디오나 스타도 - 다른 요소들 가운데 특히 - 영화의 의미 생산에서 중요 공헌자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여전히 부재하는 것은 관객, 즉 쾌락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였다.

1968년 이래로 <카이에 뒤 시네마)는 할리우드 영화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가, 아니면 이에 저항하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론을 논의에 도입하였다(흔히 '<청년 링컨 Young Mr. Lincoln> 논쟁'이라 불리는데, 카이에 그룹은 이 영화가 민주당 대통령 루스벨트의 1933~41년의 뉴 딜 정책에 맞서고 194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를 위해 공화당적 가치를 수정해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 영국의 <스크린 Screen>지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논의, 특히 그의 호명 interpellation 개념을 통해 영화-관객 관계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국면에서 이 두 잡지는 나중에 돌이켜보면 지극히 반휴머니즘적인 관객 위치화 spectator, positioning 이론을 받아들였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국가 장치(ISA: Ideological State Apparatus)들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즉, 이미 존재하는 구조로서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들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도록 subject to 개인을 구성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들은 국가의 제도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가령 경찰, 정부, 군주제 등은 모두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이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은 군주제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개인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의 효과이지 수행자가 아니다. 주체 효과 subject-effect로서 개인은 이데올로기를 준수하고 이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이데올로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일종의 거울보기 과정 mirroring process 이 발생하는데, 이 과정은 주체에게 민족적 정체성(귀속감)에 대한 확신감을 부여한다. 이것을 영화에 적용하면 의미 생산의 관점에서 영화는 관객을 주체 효과로 위치 지음으로써 관객이 스크린 위에 투사된 이미지를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의미는 주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되는 것이다.

단일한 이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필요한 것은 상호간에 보완적인 복수의 이론이라는 것이 명확해진 것은 포스트구조주의, 정신 분석학, 페미니즘 그리고 해체의 영향력을 실감한 이후이다. 개념 규정이 쉽지 않은 포스트구조주의는 다른 세 접근법(정신분석학, 페미니즘, 해체 비평)을 다시 끌어 모으면서 이것들이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도록 기여했다. 그 이름이 이미 내포하다시피 포스트구조주의는 총체적 이론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태어났고 그 출발점은 모든 텍스트가 담론과 비담론 non-discourse(즉,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le dit et le non-dit)의 이중 분절 double articulation 이라는 입장이었다. 작가 이론의 견지에서 이것이 가져온 효과는 다중적인 것이었다. "기호학과 정신 분석학의 개입은 작가의 단일성을 완전히 분쇄해 버리는 것 이었다"(Caughie, 1981:200). 포스트구조주의는 텍스트 안팎에 관련된 모든 담론(말해진 것 그리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검토하기 때문에 의미 생산과 관련된 보다 많은 영역들이 식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기호학은 텍스트 주체의 이론을 도입했다. 즉, 텍스트 과정 textual process에서의 주체의 위치가 - 관객의 위치와 작가의 위치를 포함해 - 의미를 생산한다는 젓이다. 나아가서 기호학은 텍스트 자체가 의미를 생산하는 일련의 기호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작가의 위치를 텍스트 과정 내에 위치시킴으로써 작가 이론은 텍스트성 textuality 이론 안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순수한 pure' 텍스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진 이상 영화에 있어서의 상호 텍스트성(어떤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에 미치는 효과)은 작가적 상호 텍스트성을 포함해 중요한 쟁점이 된다. 즉, 작가는 자신이 만든 영화에 의해 구성되는 하나의 형상에 불과하다. 어떤 날인을 통해 영화는 명백히 한 영화감독의 것이 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작품 등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정신 분석학은 성적, 시각적 specular, 분열된 주체(어머니와의 차이, 어머니의 상실 그리고 어머니로부터의 분리의 사실에 의한 분열 말이다. 이론을 도입했다. 주체에 관한 질문이 작동하게 된다. (텍스트, 작가, 관객 가운데) 누가 주체인가? 어떤 것이 언술하는 텍스트(즉, 행위로서의 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효과이고, 어떤 것이 관객이 텍스트에 미치는 효과인가? 무엇이 쌍방향적인 이데올로기 효과이고(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효과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 관객이 텍스트 안팎으로 이동할 때 관객이 느끼는 쾌락은 무엇인가?(관객 동일시) 텍스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의미 생산에 있어 맥락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생산 양식과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맥락 등 말이다. 마지막으로 동시에 이제 우리는 텍스트를 투명하고 자연스러우며 순수한 것으로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재현 양식이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우리는 그것을 뒤집고 해체해야만 한다.

는 1950년대부터 대두되었고, 최근에는 맥락 혹은 사회 역사적 상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 장르
하나의 용어로서의 장르를 영화 초창기로 소급해 보면, 형태에 따라 영화들을 분류 조직하는 한 방식으로 여겨졌다. 비록 프랑스 비평가 앙드레 바쟁은 이미 1950년대에 웨스턴에 대해 언급하면서 장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지만, 이 용어가 앵글로색슨 영화 이론에 결정적인 개념으로 소개된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와서 였다. 그 당시 장르를 둘러싼 논란은 작가 이론을 둘러싼 그 이전의 논란들을 대체하는 데 기여했다. 비록 최근에 들어서는 장르와 작가 이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지만 말이다. 장르는 단순한 포괄적인 목록화 그 이상이다. 닐(1990: 46, 48)이 지적하듯이, 장르는 단지 영화의 형태만이 아니고, 관객의 기대와 가설(영화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에 대한 생각)에도 관련된다. 그것은 또한 장르적 구조의 재료가 되고 그것을 구성하는 특수한 제도적 담론의 역할과도 관계한다. 다시 말하면, 장르는 제작, 마케팅(배급과 상영을 포함한), 소비(수용), 이 세 가지 과정을 아우르는 일부분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장르적 마케팅은 포스터, 기념품, 언론의 보도 자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영화!'같은 과장된 선전 문구 등을 포괄한다. 하나의 영화적 생산물을 시장에 내놓으며 행하는 '과대 포징과 관련된 모든 형태의 담론들(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 Jurassic Park>(1993)을 두고 벌어졌던 엄청난 마케팅 전략을 생각해 보라). 소비는 관객의 행동뿐 아니라 비평가와 기자들의 행동과도 관계된다. 확실히 장르들은 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시간과 함께 진화하고 때로는 사라지기도 한다. 장르들 그 자체처럼 장르적 관습들도 '진화'하고 경제적, 기술적, 소비적 이유들로 인해 변형을 겪는다. 그래서 장르들이 산업 - 그리고 관객 - 이 요구하는 기대에 응답하는 한, 그것들은 역설적이지만 보수적인 동시에 진보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산업적 관점에서 보면, 장르들은 효용 가치가 있는 공식들을 반복하지만 장르적 관습들을 전이시키고 현대화시키는 새로운 기술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와 똑같은 역설은 관객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들은 익숙한 것을 기대하는 한편, 동시에 변화와 혁신도 기대한다.

·몇 가지 일반 원칙들
닐(1990: 63)은 장르라는 용어가 적어도 대중적인
거대 오락 산업과 관련해서 최근에 나온 용어라고 말한다. 19세기 이전에 장르적이었던 것은 문학 또는 다른 고급 예술이었다. 그러나 대중적 오락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던 1800년대 후반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영향으로 입장은 뒤집어졌다. 대중문화를 상품화해서 여러 부류의 대중을 충족시키려는 필요성은 곧 이제 장르적이어야 하는 것은 대중문화라는 걸 의미했다. 장르는 언뜻 별 문제될 게 없는 개념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특히 영화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첫째로 일반적으로 말해서 영화는 장르적으로 거의 순수하지 않다. 영화의 전통이 다른 여러 형식의 오락들(보드빌, 뮤지컬, 연극, 사진, 소설 등)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이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닐(1990: 62)이 말하듯이 영화는 여러 미디어에 걸쳐 있는 장르적 형태로서 스스로를 언급한다. 설사 한 장르가 약호와 관습의 조합(말하자면 로드 무비나 뮤지컬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서처럼)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하더라도 한 편의 영화에 대해 명확한 장르적 규정이 즉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장르들 그 자체는 정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이 몇 개의 상호 텍스트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가변적이다(상호 텍스트). 장르들은 자신들을 약호화 했던 규준들을 재적용하고 확장하며 변형시킨다(Neale, 1990: 58). 앞으로 나오겠지만, 한 장르를 구속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닐(1990: 58)은이 문제를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용어 하나를 제시한다. 그는 장르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장르적 텍스트 genre texts' 대해 언급한다. 장르는 장르적 규준들을 의미하려는 것이고, 장르적 텍스트는 실제적인 영화의 생산물을 의미한다. 명확성에 대한 유사한 노력의 일환으로, 앨런 윌리엄스(Neale, 1990: 62에서 인용)는 영화의 세 가지 주요 범주를 언급하기 위해 '기본적 장르principal genres'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내러티브 영화, 아방가르드 영화, 다큐멘터리이다. 그는 우리가 보통 영화 장르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하위 장르'라는 용어를 준비해놓았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요소는 장르 또한 하위 장르를 만들어 내고, 그래서 다시 한 번 명확성이 배제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의 하위 장르는 레지스탕스 영화, 식민지 영화, 전쟁 포로 영화, 스파이 영화들(이들 대부분은 스릴러 영화 장르와 서로 경계를 넘나든다)이다. 세 번째 요
소는 장르는 추상적으로 볼 수 없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 로빈 우드(1992: 478)가 명확하게 했듯이, 장르들은'확실하지도' 않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 굴절되어 있다. 영화 장르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굴절은 다른 헤게모니적인 '실재들' 가운데 특히 성차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섹슈얼리티의 구성은 능동적인 남성 대 수동적인 여성, 독립 대 함몰(즉, 결혼이나 가족)의 이미지에 그 기반을 둔다. 섹슈얼리티는 또 선/악, 순수한 것/변태적인 것으로서 구성된다. 더 나아가서 이런 것들은 대개 공통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되는 특성들이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동정녀』창녀 신화가 강화된다. 사회의 구성은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와 결혼과 재생산을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넘어, 도시의 악대 시골 또는 소도시 생활, 윤리적 노동과 자본주의 대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악한 시도(즉, 좋은 자본주의 대 나쁜 자본주의) 등의 대립 구도를 기초로 한다. 장르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르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에 내재하는 환원주의의 위험들을 인지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다음에 명확하게 할 것이지만, 장르는 관객들의 기호나 주어진 시대의 사회 역사적인 상황들에 의해서 굴절되는 것처럼 영화 산업의자본주의적인 요구에 의해서도 굴절된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것처럼, 장르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하고 변화하며 어떤 것은 사라지기도 한다. 레오 보드리(1992: 431)가 믿었던 것처럼, 장르는 극장에 가는 관객들의 사회적, 문화적 관심을 보여 주는 바로미터로 기능한다. 장르는 약호와 관습들을 가지며, 관객들은 감독만큼(감독 이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것들에 친숙하다. 그러므로 관객들이 장르적 관습에 충실하지 않거나 아니면 동시대의 감각에 닿지 않는다고 느낄 때 어떤 장르 영화들은 '실패'하는 것이다. 서사극에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려 보라. 대신에 장르적 관습에 대한 한 영화의 부적응은 관객이 그 영화를 컬트영화로 만들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화 장르는 겉보기만큼 그렇게 보수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교대되고 변화되며 겹쳐지고(장르의 오버래핑) 전복될 수 있다. 제작의 관점에서 장르 영화는 패러디되기도 한다(예를 들면, 멜 브룩스의 <불타는 안장Blazing Saddles>, 1974 같은 영화). 또한, 영화는 관객에 의해 꼼꼼하게 해독된다.
·다른 접근 방식들: 구조주의, 욕망의 경제, 역사 이 항목을 시작하면서
장르에 관한 논쟁이 작가 논쟁을 대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가에 관한항목을 들춰 보면 알 수 있듯이 작가 논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실제 작가논쟁도 장르 논쟁과 유사하게 몇 가지 단계를 거쳤다. 글레드힐(Coot 1985:58~68)이 이들 논쟁들에 관한 탁월한 개요를 제공해 주므로 나는 구조주의적 논쟁이 장르 이론에 미친 영향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겠다(구조주의). 이 논쟁은 두 가지 것을 가능하게 했다. 첫째, 이것은 장르를 구조(이 구조는 1970년대에 '총체적 구조'라는 통과 의례를 이미 거쳤다)라는 훨씬 넓은 배경 속에 재위치 시켰다. 두 번째, 그것은 작가/장르 논쟁을 조화시킴으로써 두 개념이 상호간에 배타적이라는 오해를 불식시켰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장르는 약호와 관습의 측면에서만 고려되었고, 영화들을 약호화하는 체계로서만 고려되어 왔다. 장르에 대한 그러한 해독이 왜 구조주의자들의 실제적 연구에 중요한 부분이 됐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메츠(1975)는 장르는 일련의 순환적 변화 과정을 겪는다고 주장한다. "고전적 단계에서 고전들을 스스로 패러디하는 단계로, 영화가 자신들이 한 장르의 일부분이라는 전제에 도전하는 시기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장르 자체를 비판하는 단계로"(Turner, 1988: 86). 비록 모든 장르가 이런 운동 방향을 따르진 않지만 어떤 것들은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예를 들어 웨스턴 같은). 그러나 장르의 역학을 연구하는 데 가장 유용했던 것은 내러티브를 대립 항들의 조합으로 보았던 블라디미르 프롭의 방법론을 장르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어떤 시기에 걸친 반대 항들의 조합을 통해 장르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변화가 일어난 시점을 알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심지어 역전 inversion이 일어난 시점을 판별할 수 있는 경지까지 말이다. 프롭적인 접근의 고전적인 예는 라이트(1975)의 웨스턴 탐구이다. 고전적 웨스턴에 설정되었던 최초의 대립항 조합이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변해 갔으며, 최근의 웨스턴에서는 대립항들의 조합이 완전히 역전 했다는 것을 라이트는 증명했다. 예를 들면, 초기 웨스턴에서 가치를 두었던 것은 문명화와 강력한 사회화였다. 나쁘고 사악한 악당들 같은 반사회적 인물들을 황야로 몰아내는 것은 영웅의 역할이었다. 한 상황을 해결하고, 영웅은 표효히 떠난다. 사회와 질서는 다시 안전해지고, 바람직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영웅은 문명사회의 가치를 지킨 것이다. 그러나 후기 웨스턴에서의 영웅은 더 이상 문명의 수호자로서 사회 내적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문명은 부패하고 사악한 것처럼 그려진다. 이제 사회 안에
사는 인물들이 오히려 악당이고, 영웅은 사회 밖의 황야에 있다. 라이트는 이런 변화가 사회적 변화와 관객의 달라진 기대를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조지 로이 힐, 1969)는 당대의 청년 세대와 자유로워지고 싶고 떠나고 싶은 그들의 욕망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들어 있는 영화이다. 라이트의 분석은 장르가 우리가 처음에 믿었던 대로 의식처럼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 유용하게 봉사한다. 닐(1990: 58)이 언급한 대로, "장르의 관습은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라기보다 항상 운동 중에 있다. " 더욱이 장르는 사회-역사적인 관계일 뿐 아니라 관객-텍스트 관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장르를 고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기 위해서 기능하는 수많은 구조들과의 관계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장르의 역사와 연관해 구조주의가 끼친 영향은 그 때까지 영화에 대한 비평적 사고를 압도해 왔던 작가주의를 혁파했다는 것이고, 의미의 생산에 작가가 아닌 구조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보여 주었다는 데 있다. 장르에 관한 초기의 유익한 에세이에서 닐(1980: 19)은 장르는 영화라는 기계 장치에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적 기계 장치 또는 장치들은 관객의 주체성을 포함해 주체성의 각기 다른 층위들을 규제한다(1980: 19). 이것은 장르가 장치와 마찬가지로 욕망과 기억, 기대를 통제하는 시스템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980: 55). 닐은 욕망의경제와 관련해서 장르가 수행하는 전략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f1980: 55). 첫째로, 장르는 닐이 '심급들instances'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텍스트적인 유형학(즉, 전쟁 영화, 웨스턴 등)들에 대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일정한 수의 장르적 텍스트들(즉, 그 한도 내에서만 텍스트적 심급이 존재할 수 있다)에 대해 욕망의 조절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장르들은 영화 산업이 욕구와 제작을 통제하도록 돕는다. 두 번째로, 장르는 해독의가능성을 내포한다. 즉, 장르적 약호와 관습들은 선호된 해독을 제공하는데, 그럼으로써 기억과 기대를 조정한다. 이것은 또 영화 산업이 '그것의생산물이 산출하는 효과'(1980: 55)들을 통제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장르적 한계라는 개념은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스튜디오 시스팀의 전성기에 이 장르적 한계가 실제로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스튜디오들이 특정 장르의 제작에만 전문적으로 매달...(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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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  |  2008. 7. 25.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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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 전문과정 15기


1차 강의 : 11월 17일, 문재철


들어가며


평론집을 만드는 것이 이번 과정의 최종적인 목표라 할 수 있다.

영화 비평을 한국에서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생각해 보면 얼마 되지 않았다. 80년대 후반 정도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저널 비평의 형태로 시작했다. 현재 비평의 위기라고 하는데, 방법론도 별로 없고, 영화 잡지도 없다. 외국과는 다르게 주간지는 많지만, 계간지는 1곳 밖에 없다. 저널 비평의 경우 대중성 확보라는 긍정적인 점도 있지만,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제작 쪽보다는 비평 쪽이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비평이라는 부분에서 문학은 상업적 장점들이 있지만, 영화 비평은 영화사에서 투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1. 영화비평(Film Criticism)의 정의

   

영화비평은 먼저 영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영화사와 형식, 감독 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영화 외적인 요소만으로 영화를 평할 수는 없다. 영화사에 대한 이해가 특히 중요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영화를 많이 보는 것보다 다른 문학이나 경험들이 더 좋을 수 있지만, 평론을 하려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인상 비평을 벗어나려면 영화들을 상호 비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들을 알아야 하고, 많이 봐야 한다. 영화사에 대한 이해는 감독론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2. 영화비평의 범주


1) 영화 단평(Film Review) : Film Journalism

  - 저널리즘 비평․인본주의 비평 > 인상주의 비평 > 영화소개에 적합

  - 현재는 영화 이론도 들어간 기괴한 저널 비평이 많다. 무리한 시도. 영화에 대해 잘 몰라도 글쓰기 정도의 감각만 있으면 할 수 있다.

  - 7-80년대에 오히려 잘 되었다.

  - 번역상 review는 평론, criticism은 비평으로 하는데, 평론(review)은 저널 비평 지칭.


2) 영화 비평(Film Criticism) : Textual Criticism + Contextual Criticism

   - 본격적인 비평

   - 분석은 특정한 씬이나 시퀀스들을 shot by shot으로 구분하여 연구한 것이라 할 수 있고, 비평은 영화의 한 편을 전체로 한다.

   - 좋은 비평은 건조한 분석 말고, 희열을 주는 탁월한 분석이 곁들여져야 한다.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정보들을 제공한다. 한 번 보기와 두 번 보기가 다르다. 처음 보기는 내러티브, 줄거리, 등장 인물들의 대사를 좇아가기 바쁘지만, 두 번 보기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다. 이 스타일을 찾기 위해 영화사와 영화적인 것이 필요하다.


3) 영화 이론(Film Theory) : 영화학(Filmology) + 기술공학(Technology) + 인접학문


3. 용어상의 구분


1) Cinema : Film Theory > Grand Theory (ex, Cultualism, Psychoanalysis, etc)

2) Film : Film Criticism : Text Criticism > Context Theory

3) Movie : Film Industry (Production + Distribution + Presentation)


4. 영화 비평의 범주 1 : 내재비평과 외재비평의 상호연관성이 중요하다.


1) 내재비평 : Textual Criticism + Filmology  -> 귀납적

2) 외재비평 : Contextual Criticism + Human Studies -> 연역적


영화의 내재비평은 영화의 내재적 특성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면 80년대 한국 영화계에 처음 등장한 비평가 그룹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영화주의자로 정성일씨 같은 내재적 비평지향자와 사회적 현상으로써 이원희씨 같은 외재적 비평이 그 것이다. 내재적 비평은 영화의 외적인 사항들을 무시한다고 비판을 받으며, 외재적 비평은 영화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둘이 만나는 접점이 있는데, 그것이 작가주의이다. 한국 비평에서 주로 7,80%가 작가론과 관련된다. 둘은 균형을 이뤄야 한다. 외재적 비평만으로 허전하며, 내재적 비평만으로는 우리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야기할 수 없다. 한국 영화가 굉장히 자극적이고 혼란스럽고, 컷의 크기들이 돌출적인 것에 대해 외재적으로만 보면 한국 사회가 원래 그래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영화적 자율성(특성)을 무시하면서까지 외재적으로만 제단해서는 안 된다. ‘느와르’라는 장르는 2차 대전 후 남성성의 불안을 반영하는데, 이것은 호텔이나 빠, 뒷골목, low 키 조명, 불안정한 앵글 등 영화적 특성을 통해 드러난다.


5. 영화비평의 범주 2

 

a. 창작 주체 이론 : Auteur Theory(Auteurism) - Freud Psychology - Cine Structuralism

b. 텍스트 중심주의 : Cine Structuralism - Semiology - Film Narratology - Formalism(Modernism)

c. 반영 이론 : Film Sociology - Marxist Criticism(/Ideology Criticism) - Culture Theory

d. 관객주체 이론 : Signifying System < Identification

   - c - b - d : Jaque Lacan - Luis Althuesser - Feminist Criticism - Psychoanalysis

   - e - b - d : Genre Criticism - Star Iconography

     a - b - e

   - a - c - c : Social Criticism - Realism - Historical Criticism


고전적 영화들은 대개 영화란 무엇인가에 집중되었다. 무성 영화 시대, 초기 sound 시대, 바쟁 등의 realism 시대까지 영화 매체의 특성에 중심이 있었다. 감독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50년대였다. 트뤼포의 작가 정책이 발표된 후로 작가 주의와 작가 이론들이 등장한다.

작가주의 비평은 감독을 연구한다. 감독의 세계관이 영화에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존 포드의 스타일들은 단순히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존 포드의 경험과 생각들을 반영하는 것이다.

구조주의 비평은 텍스트의 의미작용을 강조하는데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주로 이루어졌다. 의미가 구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영화가 가지는 구조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관객을 중심으로 하는 정신분석적 비평, 페미니즘 비평이 있다. 이들은 영화가 관객에게 의미를 주명, 관객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위치의 문제가 떠오르는데, 영화는 호명한다. 하나의 텍스트가 관객들을 어떤 위치로 불러낸다. 관객이 왜 이 영화를 보는지 정신분석적 접근이 필요했다.

그러나 관객이란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이다. 각각 다르게 문제들을 볼 수 있다.

이제 자기 입장 혹은 사회 문화적 차이에서 다시 접근하게 된다.

요즘에는 역사적인 관점들이 다시 강조된다. 산업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

특정한 시대에 어떤 영화가 발전하고, 어떤 특성을 지니는지 어떤 원리들을 밝혀내는 것이고, 점점 context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비평이 흐르고 있다.


6. 내재 비평의 방법

 


Top Down 방식 : 환원론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는데, 페미니즘, 정신분석적 분석으로 영화를 제단. “고전적 헐리우드 영화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하는 과정이다!”라는 식으로 분석. 위에서 아래로 적용하는 것으로 이론을 영화에 적용하는 것이다.

Bottom Down 방식 : 구체적인 상황, 영화로부터 시작


7. 내재비평의 방법 2


1) 통시적 접근(Diachronic Approach)

  - Primitive Cinema

  - Standard Version (Silent Age)

  - Classical Decoupage (Soung Age)

  - Dialectical Version (Post War Realism)

  - Mordernism Cinema (1960~ )

  - Post Modernism Cinema ( ~ now)


작가주의 비평에 있어서 통시적 접근은 작가의 모든 작품을 보고 변화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고, 장르의 경우는 기존의 장르와 다른 점들을 찾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공시적 접근 : 6,70년대 비평들이 대표적이다.

고전적 헐리우드 영화들은 1927-1960년대까지 장르 영화인데 스튜디오 시스템을 통해 표준적으로 제작되었다. segment의 시기였다. 그럴 듯함, 박진감 넘침. 이 때가 영화 언어의 기본을 이룬 시기이다. 존 웨인이나 히치콕 등을 봐야 요즘 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알 수 있다. 60년 대 뉴아메리칸 영화들은 당시의 유럽을 많이 흉내낸 것이고, 70년 대에는 고전적 헐리우드 영화에 유럽의 특성이 더해졌다.

교과서적 영화를 많이 보는 게 좋다. 집중해서 반복해서 그룹핑으로 ...


8. 영화이론과 영화분석과 영화비평의 관계

  - 랑그와 파롤 / 시네마적인 것(the cinematic) / 필름적인 것(the filmic)

the cinematic : 조금 더 일반적인 개념이다. ‘공포영화’의 범주와 같이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 영화이론이 다루는 지점이고, 영화평론은 시네마적인 것을 가지고 필름적인 것에 적용.

the filmic : 개별적인 영화 자체

movie : 상업(경제)적 관점


9. 영화비평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가?

거듭보기(double viewing)와 창조적으로 보기(creating viewing)



<첫 강의 소감>

배포된 유인물이 강사가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쓰던 것인데 쓸 만하다고 해서 그냥 쓴다고. 그래서인지 좀 산만했다. 왔다 갔다하면서. 설명해야할 예들도 준비 안 되어 있고, 준비 부족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겠다. 영화비평이란 무엇인지 큰 그림을 그리는 첫 번째 날인데 이렇게 산만하게 지도를 그려 놓으면 뒤에 이러질 강의들을 어디에 어떻게 붙이라는 것인지. 여러 명의 강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자이크를 잘 해야 하는데 첫 번째 강의에서 밑바탕을 그려 주지 못하면 뒤 이어서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영화 cinema


활동 사진은 19세기 박람회장과 보드빌 극장에서 상연된 슬라이드 쇼로부터 출현했다.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영화는 몇 분짜리 단편에서부터 90분 내지 그 이상 길이가 되는 상영물로 발전하였다. 전후의 시절에 한편으로 우리는 전 지구적인 영화 제작의 중심지로서 할리우드의 설립을 볼 수 있었으며, 또한 독일 표현주의자들과 S. 에이젠슈타인(S. Eisenctein)이나 푸도프킨(V. Pudovkin)과 같은 소비에트 영화 제작자들의 작업을 통해 적지 않게 좀더 세련된 서사 수단의 발전을 목격할 수 있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첫 번째 유성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총 천연색 영화가 소개 되었다. 이 초창기 동안 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예술 형태로서의 영화의 위상과 그에 따른 영화와 관련된 미감적 경험에 초첨을 맞췄으며, 또한 카메라 다루기, 숏의 길이와 성격 그리고 편집 과정(많은 부분 몽타주 역할에서) 같은 영화적 기술의 발전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한 기술적이고 미적인 본석들은 영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성찰로 보완했다.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인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벤야민과 더불어 영화와 이데올로기의 관계(예를 들면, 문화 산업의 이론화를 통해)와 기계 복제에 토대를 둔 예술 현태들이 전통적인 예술 개념과 미감적 경험에 강한 충격에 초점을 맞췄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독일 마르크스주의 영화 분석은 지그프리트 크라키우어(Siegfried Kracauer, 1947)의 작업에서 가장 현저하게 지속되었다. 1951년에 발간된 프랑스 비평스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는 편집자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1967)의 글쓰기에 상당히 도움을 얻어, 영화 비평에 대한 특유의 접근 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 연계된 집단들은 영화 감독을 작가로 설명하는 방식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고도로 통제되는 제작 과정의 일부가 되어버렸을 수도 있는 할리우드 감독들이 어떻게 해서 그들이 구축한 독특한 스타일의 씬들을 통해 영화를 작가성(authorship)의 기호로 특징지을 수 있었나를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바쟁은 영화의 적극적인 해석자로서의 관객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켰다. 그는 몽타주에 대해 강조하는 에이젠슈타인의 방식을 삼가고 ‘딥 포커스’ 편집으로 명명된 방식을 선호하는 리얼리즘 영화가 표현의 다의성을 위한 더욱 큰 여지를 주며, 그로써 현실적 삶의 다의성을 재생산하는 동시에 관객으로부터 더욱 큰 해석적 노력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에 <카이에 뒤 시네마> 그룹은 자신들이 감독을 작가로서 찬양하는 것과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도전은 영화에 구조주의적이며 기호학적인 접근 방식을 적용함으로써 나타났다. 구조주의에서 영화는 하나의 텍스트로 취급된다. 크리스티앙 메츠(Christian Metz, 1974)의 작업을 통해 예증되는 구조주의적 비평의 과제는, (통합체로 취급되는) 중요한 영화적 요소들의 의미 있는 조합의 범위를 규정함으로써, 텍스트의 숨겨진 의미와 그것을 떠받치는 문법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부극에 대한 윌 라이트(Will Wright, 1975)의 분석은, 모든 서부극에 공통적인 일련의 이항 대립들(사회 내부 / 사회 외부, 선 / 악, 강함 / 약함, 문명 / 야만)이 다양하게 접합되는 방식을 주로 영웅이 사회와 관련하여 취하는 위치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1950년대 후반의 서부극에서 이러한 대립은 역전되어서, 막강한 사회는 이제 선한 영웅에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구조주의적 설명이 작가에 대한 선입견과 그에 따른 작가의 의도나 양식을 통한 영화에 대한 해석을 불식시킨 반면, 그 설명들은 여전히 영화로부터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가장 심하게는 영화가 그것이 생산되는 역사적, 물질적 조건들로부터 고립된 하나의 텍스트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구조주의 그 자체는 포스트 구조주의의 부상 및 그와 연계된 다양한 접근 방식들(데리다와 해체주의, 라캉적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등의 영향을 통해 상당 정도)에 도전을 받게 되었다. 영화는 다른 텍스트들로부터 고립된 하나의 텍스트로 보여지는 것을 중단하고 다른 텍스트들과의 다수의 가능한 관계들이라는 측면에서 접근된다. 따라서 영화의 의미는 텍스트들간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 생겨나는 유동적인 것이 되었다. 그 핵심에 있어서 포스트구조주의적 접근 방식은 영화 텍스트를 통한 저자와 관객 양자의 구성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객의 응시, 그리고 이러한 보기로부터 얻어지는 관음증적 쾌락이 이러한 분석에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영화는 어떤 바라보는 주체를 전제하거나 구성한다. 메츠의 작업을 예로 들자면, 처음에는 이와 같은 관객이 남성인 것으로 상정된다. 여성은 영화 내의 주인공에게나 청중 가운데 남성 관객에게 ‘보여지는 무엇’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보는 것에서 얻어지는 쾌락은 겉보기에는 남성 판타지 내에(그러므로 남성 주인공이 한 여성을 발견하고, 정착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오이디푸스적 궤적’에) 속박되었다. 로라 멀비(Laura Mulvey 1975, 1993)는 이를 더 심도 깊게 탐구했다. 남성의 응시는 여성의 쾌락을 위한 어떤 명백한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다. 멀비는 주장하기를, 여성 관객은 그러므로 스크린 위로 수동적인 여성의 시점(불쾌의 시점)과 동일시하거나 아니면 남성의 시점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비가부장적인 영화의 가능성은 전통적인 영화 형식들에 대하여 급진적인 도전을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문화 연구적인 영화 접근 방법의 구성 요소는 민속지학적 연구들의 사용에서 발견된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관객을 영화의 텍스트성의 산물로 환원시켜 관객의 성격이 텍스트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는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경험과 태도에 대한 경험적 연구들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이와 같이 재키 스테이시(Jakie Stacey)의 작업은 스스로를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열렬한 영화 관람자였다고 말하는 여성들과의 인터뷰에 기초해 있다. ‘현실 도피증’, ‘동일시’, 그리고 ‘소비주의’와 같은 범주들을 통해 그녀는 영화 보러가기의 유토피아적 측면을 탐구한다(영화 텍스트가 청중이 경험하는 실제 사회 문제들을 위한 해결책을 제공한다고 하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하나의 구축물인 영화 속에서 경험되는 실제적인 쾌락을 인정하는 한에 있어 상방 부분 다이어(R. V. Dyer, 1985)를 따른다. 그러나 그것과 관련하여 관객들이 영화, 스타 그리고 여타 영화와 관련된 산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자기의식을 강조한다. [문화이론사전, 292-293,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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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  |  2008. 7. 25.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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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된 결함을 찾아, 천국에서 가까운 사랑을 찾아... | 영화일기 조회수 64 | 스크랩 0
http://blog.cine21.com/ropheka/7856 2005-03-07 18:55:08

Far from Heaven...


파 프롬 헤븐은 삶의 어떤 구멍, 함정, 결핍에 관한 영화다.


구멍이란, 함정이란, 결핍이란 누구든지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결함이다.


결함이라고 해서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것이 결함을 가졌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편견에 의해 가치 판단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결함이란 차이가 있다는 의미와 더불어 그것은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결함이라는 단어의 우선적 의미는 차이가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다음의 의미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차이이기 때문에 보통 명사로써 결함이 된다.


서로가 가진 차이는 서로를 인정할 때 부각된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줄 아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나인 것을 보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사회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혹은 결함을 자신이 인정하지 못한다면 결함은 끝내 나를 잠식하게 된다.


나에게 구멍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구멍은 점점 커져


마침내는 나를 구멍에 빠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성적 취향을 결함으로 가지고 있다.


그는 오래전에 그것을 발견했지만 어디까지나 감추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1950년대 중반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동성애란 어느 정도 불가항력적임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동성애의 반수 이상은 전기충격이나 호르몬 요법 같은 물리적 방법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질병’이었다.


미국 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이성애와 다를 바 없다고 인정한 것이 1994년의 일이고,


그 이전까지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결함이었다.


프랭크 자신에 의해서도 결함은 메워질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을 은폐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자신의 결함을 발견한 후 그는 8년 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달려왔다.


되도록 결함이 무엇인지 잊고 살기 위해 더더욱 그는 고투해 왔다.


프랭크는 그런 방식으로 삶에 대해 투쟁한다면


감쪽같이 결함을 묻어 버리고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결국 감추어진 결함은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다.


내 안의 구멍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수록 커지는 법이다.


아내 캐시에게 들켜버린 자신의 결함. 끝내 고개를 내밀고 인정해 달라고 소리치는 함정.


프랭크에게 이 순간은 절망적이면서 동시에 희망적이다.


결함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마찬가지로 아내와 아이들과의 모든 관계를 파괴하는 일이 되고 만다.


프랭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결함을 감추고자 한다.


이미 환하게 드러나 버린 결함이건만 아내만 아는 비밀로 은폐를 다시 시도한다.


결함이란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못할 뿐이다.


결함의 사실을 알아도 그것을 은폐해야 할 목적이 일치하는 사람사이에서 그것은 숨겨질 수 있다.


은폐의 공범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드러나기 시작한 결함은 더 이상 자신 속에서 통제될 수 없다.


아내와의 공범적 공감을 통해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동성애 때문에 직장에서 해고에 가까운 한 달 휴가를 받았을 때


프랭크는 비로소 자신의 결함은 스스로의 의지로 좌우될 수 없는 것임을 경험하게 된다.


캐시에게 고백하듯 그에게 ‘사랑이란 것이 이런 느낌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됐어.’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은폐될 수 없이 드러난 결함은 다만 차이로만 인정되지 않는다.


이제 보통명사로써 결함의 진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차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가치 판단된다.


그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한 쪽을 편들기 때문에 대중들에 의해 비난받는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사회에서 버림받게 되는 일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진실하다고,


이것이 참된 것이라고 느끼는 사랑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가 받아들여야 할 고통은 진실한 사랑과 함께 그에게 온 것이다.


앞으로 그가 감수해야 할 인생은 결함을 차이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와의 줄기찬 투쟁으로 범벅되어야 한다.


결함을 감추고 은폐할 때 그의 인생의 목표는 행복한 가정이었지만,


결함이란 감출 수 없고 감추려 할수록 힘을 얻는 것이라 인정할 때


그의 목표는 진실한 사랑을 찾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물론 그것이 이전까지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어 왔던 책임을 송두리째 내팽개치는 일이 되겠지만,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것이 결함에 의해 자신이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캐시에게 결함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행복한 가정을 꾸려내는 모범이다.


성공한 남편을 만드는 지혜로운 양처이며,


그녀는 아들과 딸에게 늘 또박또박한 어조로 바른 생활을 가르치는 현모이다.


파티를 열고 스스로 파티의 주인공이 되는 사교계의 여왕이다.


그녀는 딸에게서는 자신이 커서 닮고 싶은 여자이고, 남편의 친구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미인으로 칭송되며,


그녀의 단짝 친구로부터 부러움을 산다.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그녀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며 살기에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의 결함이 드러나자마자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본래부터 캐시에게는 없었던 결함이 남편의 결함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을까?


아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결함을 감추어왔을 뿐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캐시의 모습은 언제나 페르조나의 모습이다.


자신의 감정과 속마음은 늘 감추어져 있다.


여자 친구들과 만나 남편과의 성생활에 대해 농담할 때에 조차도 캐시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남편이 다른 남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고서도 그녀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녀가 마침내 울게 된 것은 남편이 어쩔 수 없는 선을 넘어선 다음이었다.


늘 주변의 사람들 속에서 페르조나만을 보여주는 그녀에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단짝 친구 엘리나에게 고백하듯


흑인 정원사 레이몬드와 이야기할 때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캐시가 레이몬드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잡지사에서는 행복한 가정,

아니 사회적인 부러움의 대상이 될만한 가정을 꾸려가는 캐시를 취재하러 왔을 때였다.

프랭크는 자신의 결함이 무엇인지 일찍 알았던 반면 캐시는 그렇지 못했다.

결함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녀는 행복했다.

그러나 레이몬드가 등장했을 때, 그리고 그와 대화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결함을 발견한다.

그녀의 결함은 바로 소통하지 못함에 있었다.

그녀는 셀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사교계의 여왕으로 칭송되지만

정작 그녀에게 공감할 수 있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레이몬드는 전단지의 광고처럼 ‘다른 사랑’이 아니라 소통의 관계였다.

남편에게서, 단짝 친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소통의 감정들을 흑인에게서 느꼈을 때,

그것은 그녀를 압도하는 사회적 결함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서로 다른 피부색이 캐시의 결함을 은폐하도록 강요했다.

그녀가 발견한 유일한 소통의 관계였지만, 그녀는 백인이고 그는 흑인이므로 인정될 수 없다.

그녀가 레이몬드와 함께 트럭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는 소문이 돌고,

그 소문을 전해들은 남편이 술에 취한 채 회사에서 달려왔을 때 그녀는 절망했다.

애초부터 남편과의 관계는 소통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다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목표였을 뿐이었다.

자신이 소통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음을, 또는 극대화된 페르조나 속에서

자신은 은폐되어 있다는 것조차 행복한 가정이라는 목표 때문에 감추어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소통의 관계가 다가왔을 때 남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프랭크의 결함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캐시에게 프랭크의 이러한 반응은 배신과 같은 것이었다.

하긴 둘은 처음부터 소통하지 못했으니

서로를 향해 쓴 가면이 드러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캐시도 프랭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결함과 타협하기 위해 애를 쓴다.

남편과 설전 끝에 레이몬드를 이미 해고했다고 말하고서,

그녀는 레이몬드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고하지만,

프랭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소통의 관계를 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캐시는 조금더 용감했어야 했다. 좀더 자신감을 가졌어야 했다.

남편과 이혼한 다음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가 아니라

프랭크처럼 결함을 결함으로 인정하고 사회와 맞서 싸울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소통의 관계인 레이몬드를 뒷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찾았어야 했다.

먼 훗날 레이몬드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과 유일한 소통의 통로를 잃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소통 없는 삶이 그녀를 질식하게 만들어왔는데,

그녀는 다시 그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려는 것일까?

캐시의 삶에 대한 자신 없음, 혹은 투쟁성의 결여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흑인에 대한 차별에 관해 레이몬드와 이야기하면서

캐시는 다음 세대에는 그런 차별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감독은 레이몬드의 딸이 백인 아이들에게 테러 당하는 것을 보여 주면서

투쟁이 없이 바램을 갖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캐시는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몬드와의 관계 역시 그녀는 사회의 비난과 손가락질 때문에 스스로 포기해야 했다.

삶은 이 세상과의 끊임없는 투쟁일 수밖에 없음을,

미래에 어떤 낙관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망각한 캐시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프랭크와 캐시는 자신의 결함이 사회적으로 드러났을 때 그것에 서로 다르게 대처했다.

프랭크는 행복을 찾아갔지만 무책임할 수밖에 없었으며, 캐시는 책임을 감당하려 했지만,

그 대가로 유일한 소통의 관계를 포기해야 했다. 과연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천국에서 가까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결함이 더 이상 감추어져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있는 결함은 서로를 사랑하며, 이해하며, 차이를 드러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럴 때에만 드러나고, 인정되며,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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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08. 7. 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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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도 난다.. | 영화일기 조회수 62 | 스크랩 0
http://blog.cine21.com/ropheka/11358 2005-04-27 16:57:40
이렇게 가슴 졸이며 보았던 영화가 얼마나 있었을까?

버려진 그 작은 아이.
그의 엄마는 아이를 개새끼라 불렀다.
부모를 죽인 군인들 때문에 얻게 된 아이.
결국 아이를 버리고 엄마는 자살을 하고.

버려진 그 작은 아이.
그가 헤매던 곳은 지뢰밭이었다.
한 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끝장인 곳.
하늘 높은 곳에서 비행기로 뿌려댄 숨겨진 무기.
적군을 향해야 할 무기는 버려진 이 아이의 운명을 노리고 있다.
휴.....
아이를 구하러 들어간 위성.
오지마, 움직이지마 하고 소리친다.
급박하게 오가는 카메라의 시선.

전쟁 영화였다면 숱하게 죽어가고,
숱하게 폭격당하고, 숱하게 사지가 절단되어 나가더라도
아파하기는 커녕 그것을 즐겼을텐데...

휴....

꽝...!

바흐만 고바디의 절제된 영화문법 속에 고스란히 담겨진 현실.
영화의 힘일까, 현실의 엄혹함일까.
그 아이들의 눈물, 흐느낌, 몸부림....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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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08. 7. 2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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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의 <태어나기는 했지만 (生まれてはみたけれど, 1932)> | 영화일기 조회수 97 | 스크랩 0
http://blog.cine21.com/ropheka/11559 2005-04-28 15:41:49



맨날 말로만 듣던, 책에서만 보던...오즈.
차마 재미없을 것 같아 범접하지 못하던 차에...<태어나기는 했지만>을 보게 되었다.
1932년에 만든, 무성 영화.
하스미 시게히코가 '~ 한다는 것'이라고 제목을 달고 그것의 의미를 한껏 풀어 놓았던 오즈의 미학.
그것을 보게 된 것이다.
글쎄...한편의 영화를 보고, 그것도 한번만 보고 뭐라고 이야기할 순 없겠지.
한 편을 보고 그를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지나친 건방일거구.
그를 알기보다는 그의 한 영화를 본 것으로 평해야겠지.

영화에서 오즈는 줄곧 어린이들의 시선을 내세운다.
카메라는 어린이의 키 높이에 맞춰져있고, 그래서 어른들은 화면을 위아래로 길게 채운다.
때때로 짤리다시피 한다.
바로 그 높이에서 오즈는 삶의 고단함과 때때로 어쩔 수 없음을 은근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이 은근함은 어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어린이들은 이 은근함 속에 감춰진 부조리들을 너무나 당당하게 뱉어낸다.
'아빠는 훌륭하지 않아!'라고 소리칠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이들의 그런 반응 앞에서 어른은, 아빠는 당연하게 엉덩이를 때린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한 것일까?
회사 중역에게 인사해야 좋지 않을까 라며 되묻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아이들의 질서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질서는 평화로움을 향해 나아간다.
아이들의 시선과 어른들의 시선은 상당히 격렬하지만,
오즈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지는 않는 것 같다.
도리어 그것은 더욱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겪어야 할 힘든 삶을 계속 살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리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소소한 즐거움들과 신선함들.
오즈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에
<태어나기는 했지만>이 감당하지 못 할 상처로 남지 않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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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08. 7. 25.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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