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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像의 울림 - 해당되는 글 1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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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듄 파트2를 어디서 봐야하는지 논란이다.
  2. 정작 티모시는 스마트폰으로 봐도 좋다고 한다.
  3. 감독은 돌비 사운드가 지원되면 좋다고 한다.
  4. 어떤 포맷으로 봐도 관계없다. 
  5. 다만 작품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상영관이 있다면, 거기에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6. 이를테면 위 사진처럼, 용아맥 포맷이 아닌 다른 포맷에서는 화면이 잘린다.

7. 영화 감독은 영화를 찍을 때, 모든 화면에 대해 감독한다.

8. 미장센의 모든 부분에 감독이 관여한다. 

9. 감독은 화면 전체를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10. 그렇다면 잘리지 않은 장면을 보는 것이 감독의 의도에 가깝지 않을까?

11. 어디서 봐든 상관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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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 情報  |  2024. 3. 2.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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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the 영구, by the 영구, for the 영구...

영구의 변함 없는 모습.
다만 나이가 먹은 모습.
변화가 없다는 것만으로 캐릭터가 만들어지진 않을 것이다.
일관된 스타일이 세월의 흐름 속에 잘 녹아나지 못하면 구태의연함이 될 수도 있다.

영구는 언젠가 훌쩍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보여준다.
뭔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자신을 믿고 있고,
어리숙함이 역사를 바꿀지도 모른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너무나 큰 부담이다.
언젠가는 그냥 떠나고 싶은 압박감을 영화 속에서 느낀다.

다시 한번 어떤 말로도 이 영화를 표현 못하겠다.
이 말 말고는...
영구의, 영구에 의한, 영구를 위한 영화 라스트갓파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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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11. 1. 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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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젤워싱턴이 주연한 영화..
수백년 동안 인종차별이 지속되어왔고 그것때문에 전쟁ㄲㅏ지 치룬 나라.
이념적으로 대립된지 1백년에 전쟁을 치룬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치열한데..... 미국에서 흑백 갈등은 더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 않겠지.
리메버 타이탄은 그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느 날 졸지에 통합하게 된 흑백 고등학교의 럭비팀.
독재 리더십으로 하나를 만들어가는 분 코치.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살벌하지만 영화는 그 분위기를진솔하게보여준다.
지금 잘 하 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더욱어렵다..
흑백으로 나뉜 팀을 하나로 만들고
주변의 도전들을 이겨나가는 것이 어찌 쉬울까?
백인 코치 요스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것도포기해야하구.
어떻든 비열한 방법으로라도 기득권을 지키려는 노력은 헛된일인데..
게리가 교통사고로 입원해서 흑인 동료 줄리어스가 문병왔을 때
가족말고 면회가 안된다는 간호사에게 "우린 닮았어요. 형제라구요!"
말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요스트 코치의 딸 쉐릴
9.5 살이라는데 대단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신들의 편견에 맞선 타이탄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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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10. 12. 2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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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을 만지던 느낌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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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10. 10. 26.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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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꼭 영화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 영화 재미있습니다.
극 전개도 탄탄하고, 반전도 극적이고, 마무리도 깔끔합니다.
굳이 흠 잡을만한 한 두 장면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완성도 높습니다.
물론 시원, 상쾌, 통쾌한 재미는 아닙니다. 긴장의 재미가 있지요.

김혜자씨 연배의 어머니들은 대개 몰입해서 보신다고 합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함께 겪었음직한 에피소드들 앞에서 애틋한 모성애가 자극되는 듯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식 키우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뒤틀려진 사회, 아버지의 부재, 엄마에게만 맡겨진 양육의 짐.
어떻게든 아이를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도록 키워야 하니까요.
정글보다 심한 식민과 천민자본주의, 무한 경쟁의 '대한민국' 근현대사 속에서
아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고 자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듯 싶습니다.
용케도 대한민국이 이 정도라도 버티는 것을 보면 참으로 우리 어머니들은 용하신 분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그 뒤켠에 숨겨진 누군가의 책임과 잘못을 드러나게 합니다.
영화 보기보다는 재미없겠지만, 누군가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겠지요?

(이하 스포일러 아주 많습니다~그리고 말투도 바뀝니다^^)
누구에게 돌을 던질까? 1. 당연히 엄마에게!

김혜자씨가 연기한 엄마. 엄마의 삶은 말할 수 없이 고단했다.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는 그는 한약  재료를 파는 가게의 점원에 불과하다.
그는 그저 한약재로 쓰는 말린 풀을 손작두로 자르며 생계를 유지한다.
때때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무면허 침술사 노릇을 하기도 한다.
침술사 노릇도 한약재료 가게 주인의 저지로 쉽지 않다.
그는 혼자다. 이를테면 아버지의 부재이다.
생계수단의 제공은 전통적으로 남편이자 아버지에게 주어진 의무이지만,
영화에서 아버지/남편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삶의 고단함은 '도준'이 다섯살때 동반자살을 기도하게 할만큼 가혹했다.
얼마나 힘들면 자식에게 농약을 먹이고, 자기도 같이 농약을 먹고 죽고 싶었겠는가?
그 후유증으로 도준은 지적 능력에 장애가 생기게 된다.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지겠지만, 영화에서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다섯 살 때 농약이다)
삶은 곤궁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지적으로 지진하다.
죽을 수 없다면, 어떻게든 그의 아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엄마가 택한 전략은 아들을 강하게 키우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를 '바보'라 부르면 응징하도록, 그리고 한 대 때리면 두 대로 돌려주도록 끊임없이 세뇌했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처럼, 도준은 '바보'라는 소리만 들으면 아무 생각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이 단어에 도준은 무조건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어느 누구도 자식이 다른 사람들의 모욕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적으로 잘 성장하지 못한 도준에게 세뇌된 이 반응은 급기야 살인을 불러온다.
강자가 조롱할 때 도준은 피해자가 되지만, 약자가 조롱할 때 도준은 살인/폭력자가 된다.

자,  지금 엄마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
인간에 대한 배려, 이웃에 대한 사랑, 공동체 의식, 사회적 책임감?
웃기지 말라. 어떻게든 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도록 아이들을 몰아간다.
그것의 방법이 어떠하든 상관없다.
무조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 이기지 못하면 도태된다.
아이가 습득하게 되는 삶의 방식,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오로지 '승리'뿐이다. 다른 사람을 짓누르고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산다.

도준이 지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 뒤틀린 아이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도준은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는 과정 모두를 완전히 잊어버린다.
(언젠가는 생각이 나겠지만... 생각이 나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것들이 떠오르던 것처럼)
'도덕성', '인간성'을 상실하도록 엄마는 도준을 키운 것이다.
도준의 잘못은 순전히 엄마의 잘못이다!

누구에게 돌을 던질까 2. 개인의 무한책임만을 강조하는 사회!
최근에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사회에서 시장(市場)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한국인이 직장을 잃게되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화의 90% 이상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죽어라' 시장에서 일해야 살 수 있고, 일 자리를 잃으면 인생도 끝장이 난다.
스웨덴 같은 나라는 직장을 잃어도 다른 경로를 통해 50% 정도의 수입은 유지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
한국 사회는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나눠진다.
물론 그 능력은 세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이 소유한 것이 많으면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대단히 고통스런 삶을 감내해야 한다.
무능력자. 한국 사회에서 필요없는 존재이다.
영화에서 홀로 된 '엄마'는 제 입에 풀칠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도준이 다섯 살 무렵 농약을 함께 마시게 된 것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엄마의 짐을 대신 나누어 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엄마의 짐은 그 만이 질 수 있고, 게다가 '도준'은 더욱 무거운 책임을 엄마에게 떠맡긴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우리 사회에는 없다.
성장과 분배의 논란이 일때면, 사람들은 대부분 성장에 손을 든다.
성장이 있어야 분배가 있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성장하고 있을 때에도 분배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성장하지 않을 때, 더 고통스럽고, 힘들 때 분배의 문제가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 책임감과 연대감의 결여는 한 개인의 삶을 경쟁으로만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어느 누구도 함께 해 주지 않는 외롭고 고독한 엄마의 삶을,
고물을 모아 살며 외딴 곳에서 홀로 살아가는 할아버지의 삶을,
몸을 팔아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여중생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삶을...


영화에서 엄마는 기억력이 좋아지게 한다는 허벅지 안쪽의 침자리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뒤틀려버린 현대사, 아버지의 부재, 무한 경쟁의 현실을 기억해 내야 한다고 자꾸만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침자리는 은밀하게 숨겨진 곳에 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깊은 곳에 잠복해 있다.

젠장,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이 정도라면 행복해하면 되는 걸까?
도준이처럼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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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발리우드하고 뭔가 비스무레한 듯 하지만 달랐어..

물론 노래와 춤이 절대적으로 모라자고,

분위기도 좀 다르긴 했지만, 나름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내주면서도~

또 한쪽의 슬픈 결말도 있고...

근데, 이 영화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어.

슬럼독이 사라져서 빌딩이 되었고,

거기 살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흩어져버렸다고?

근데 슬럼독은 외곽으로 더 확장되어 가고,

범죄들은 더 기승을 부리고...

그저 대리만족만으로 만족하고 살아라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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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그의 죽음 장면....십자가에 달린 예수..
희생으로 소망과 구원을 창조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두들 화끈한 복수를 꿈꾸지만, 그것은 또다른 비극의 시작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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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젤리나 졸리
'미스터앤미시즈 스미스' 같은 부류의 영화만 기억나는 안젤리나 졸리.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연기도 잘 하고...잘 어울린다.
니콜키드먼이나 메릴스트립이 쓰면 더 어울릴법한 모자라고 생각했는데,
첫 장면은 그렇게 어색했는데..전작의 아우라에 이미지가 묻히지 않는다.
나름 내공이 쌓인 것 같다는 느낌.

2. 경찰공화국
영화는 썩을대로 썩은 경찰. 부패한 경찰의 독주, 오만한 권력의 방종을 그대로 보여준다.
공권력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의 잇속을 챙기거나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더러운 힘들.
도대체 진리도 없고, 기준도 없고, 방향도 없고,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애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권력의 더러움.
용산에서 그렇게 사람이 죽어가도 미안하다 말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무혈동물들.
어찌나 닮았는지....
부패의 경쟁자를 죽이는 동안,
경찰의 실수, 음모를 감추기 위해 뻘짓하는 동안 스무명의 아이들이 사이코패스에 의해 죽어간다.
어찌나 지금과 똑같은지...
한쪽에선 시위 막는다고 경찰특공대가 밥 먹듯이 투입되고,
전투경찰들은 예전에 비할 데 없이 분주해지고...
대신 강호순 같은 사회가 낳은 살인마들은 곳곳에서 설치고 있고...

3. 교회의 역할, 목사의 역할
영화의 한 축에는 장로교 목사가 등장한다.
소위 현재의 복음주의 교단의 선조격이 되는 교단.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고, 여전히 흑백 차별의 기운마저 감지되는 보수적인 경향...
그런 장로교회 목사가 경찰의 비리를 밝히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았다는 것..
개인의 죄에만 집중한 채 시대와 공동체의 죄악에는 눈감고,
그 죄에 묻어 살아가는 기독인들.
아마 그 목사는 지금 우리 시대에서는 정치 목사라는 낙인 찍힌 채, 매장당하겠지..
공동체의 죄악을 고백하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바로 잡는 것 역시 신의 뜻이고.


4. 몇몇 장면들
- 1930년대. 매카시 선풍으로 뒤틀린 대로 뒤틀린 시대.
흑백차별과 여성과 아이에 대한 편견이 가득찬 풍경들.
영화는 흑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전쟁의 시대이자 광기의 시대였다.
모두가 미친 척 살아야만 하는 시대. 누구하나 용기있게 무엇인가를 말할 수 없는 시대.
...지금은?

이 영화...재미도 있고 생각할 것도 많다.
지금 이 시대에 촛불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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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映畵를 본 後  |  2009. 2. 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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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속의 여성 이미지 연구


19~20세기 초 페니미즘의 1st wave는 여성의 참정권 운동이었다. 60년대 2차 wave가 일어나는데 이 때는 전세계적으로 혁명적인 시기였다. 우리나라 4.19나 미국의 반전운동, 히피문화, 페미니즘 운동, 동성애 운동, 인권 운동 등. 기존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남성과 백인, 자본가에 대한 광범위한 도전이 이루어졌다. 제 3세계 탈식민지 운동과 그 밖의 시민권 운동도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여성은 여전히 타자이자 주변적이고 종속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

페미니즘에 대한 접근에 두 접근이 있는데 하나는 자유주의적 접근이다. 이것은 부분적 개선을 쟁취하려는 것이고, 여성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첫 번째 물결의 대부분의 내용에 해당한다. 두 번째 물결은 급진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이었는데,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며 굉장히 투쟁적이었고, 막시즘이나 사회주의 등의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서구에서 이슈 중의 하나는 여성의 sexuality였는데, 특히 낙태권 운동은 내 몸의 권한은 나라는 것을 선언한다. <the Wall>이라는 영화에는 낙태와 관련된 3가지 경우의 여성들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슬로건은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6,70년대 페미니즘의 가장 큰 의의는 일반 여성들의 의식을 바꿨다는 것이다. 의식 고양 운동인데, 여성의 눈으로 본 영화 혹은 일상이 담긴 페미니즘 다큐멘터리가 제작된다.


70년대 정치적 영역에서 문화 영역으로 옮겨 가면서 1973년부터 페미니즘 영화가 본격화한다. 시네 페미니즘에서 첫 출발은 여성의 이미지가 영화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헐리우드 대중 영화, 장르 영화를 중심으로 연구했다. <Popcorn Venus>, <From Reverence to Rape>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방법론은 이미지에 초점을 맞춰 사회학적으로 실증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미지가 독립/종속적인지, 긍정/부정적인지를 살핀다. 두 가지 여성상으로 정리가 가능한데, Virgin(성처녀)과 Femme fatale인데, 팜므파탈은 결국 뒤에 처벌을 받게 된다. 최초의 여성 영화 스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가 등장하던 시대만 해도 victorian 시대로 그녀는 계속 소녀의 모습으로만 나와야 했다. 그것은 여성의 sexuality를 나타내는 것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20년대엔 왈가닥이면서도 결혼할 때에는 남자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모습으로, 30년대에는 공항기인데 처세술에 능하고, 여신에 가까운, 성스러운 느낌까지 주는 여성상이 선호되었다. 40년대에는 전쟁터에 나간 남성을 위로하는 여성들이 인기였는데, 이들은 글래머에 금발이어야 했다. 50년대에는 친근하고 평범한 이미지가 선호되었다.

60년대에는 성해방주의가 등장하는데, 4,50년대에 대한 반발로 빈약하고 어린 소년 같은 신체를 지녔지만 반도덕적이고 조숙한 여성이 인기를 누렸다. 70년대에 버디 영화(<내일을 향해 쏴라> 등)의 등장은 여성의 부재를 나타내는데, 주로 여성은 이 때에 방해물로 등장한다. 시대별로 virgin과 팜프파탈이 반복되는데, 이것은 남성들의 성적인 욕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조금씩 바뀔 뿐이지 대체로 여성들을 부정적으로, 의존적으로, 비현실적인 이미지로 그린다.

페미니스트 아방가르드 영화는 기존의 영화들이 남성의 시각과 남성적 언어, 미학, 영화 문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에 대해서 실험적 작업을 진행한다.

여기에 정신분석학을 도입하는데, 정신분석학은 성정체성의 원인과 성별화의 원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영화 분석과 심리 분석의 친연성도 정신분석학의 도입을 촉발했다. 


로라 멀비는 남녀를 너무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면서 접근하였고, 영화에서 남녀의 경계선을 넘는 경우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며, 또한 여성의 쾌락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이어진다.


1) 엘리자베스 코위1) : 장르적 변동과 성적 동일화

동일화를 고정된 것으로 보는 멀비의 시각을 넘어서려고 한다. <혼수상태>라는 영화를 분석하는데, 이 영화는 앞부분은 탐정 영화로, 뒤는 스릴러로 분류될 수 있다. 장르의 변화는 관객의 변화 곧 동일화의 변화를 가져온다. 저녁에 tv에서 하는 드라마들을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볼 때 일관성 없이 동일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며느리 편 했다가, 시모 편 했다가 왔다 갔다 하는데,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상황과 위치에 따라 동일화의 대상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코마>에서 보면 주로 남성이 맡아왔던 주인공 탐정역을 여주인공이 맡게 되고, 뒤로 가면서는 스릴러로 변하면서 여주인공이 죽음의 위협에 노출된다. 탐정 영화의 서사의 핵심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해설이기 때문에 지식의 정보 배분에서 탐정과 관객이 평등하다. 그러나 스릴러 영화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관객은 알고 있지만, 등장인물은 모르는 정보 배분의 불평등함이 있을 때 스릴러는 스릴러다워진다.

모성 멜로 드라마(<미워도 다시한번> 등)에서도 동일화의 대상이 달라진다. 남성의 영화보기는 monocular, linear, coherence의 특징을 지닌다. 반면에 여성의 영화보기는 multiple, fluid, contradiction 하다.

모성의 재생산과 관련해서 어떻게 여성, 남성의 정체성이 생기는가를 생각해 보면, 남성은 어머니와 끊임없이 분리 부정해 가는 과정을 거치지만, 여성은 어머니에 대해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해야 하는 성장 과정을 거친다. 대문에 영화 보기에서도 다양한 시선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저글링이 가능하다. 한 위치, 한 인물이 아니라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인물을 볼 수 있다.


2) 미리엄 한센- 성애적 대상으로서 남성

1920년대 발렌티노라는 남자 배우가 엄청난 인기가 있었는데, 그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2가지 전제를 든다. 하나는 1차 대전 후 전쟁이 가져온 성 역할, gender의 변화인데, 남성 대신 여성이 노동력을 사용해야 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서구에서 소비주의가 본격화되던 때였고, 쇼핑의 주체가 여성이기 때문에 계속된 환상을 심어주고 부추김 당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남성 배우가 있었지만 발렌티노가 인기를 얻었던 이유에 대해 이론적 배경을 연구하면서 전통적 영웅상이 아닌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렌티노가 보는 대상이자 보여지는 대상에 놓여 있게 된 것으로 양가성을 지녔음을 밝혀낸다.


◇ 문화 연구의 여성 관객성 연구

문화 연구에서는 audience를 실제 살아 있는 대상, 존재로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 스타와 여성 관객들 간의 관계 - 재키 스테이시

기존의 관객성 연구가 영화와 만나는 순간에 집중했다면, 스테이시는 영화를 본 후 집에 돌아와서까지 삶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했다.

① 스타의 정체성 - 관객의 정체성 사이의 환상에서 출발

- 몰두와 숭배 : 팬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스타들을 평가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자신과 스타와의 ‘차이’가 낳는 쾌락과 매력의 근원지인 이런 차이에서 결과되는 ‘거리감’을 표현한다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차이를 가로지르고자 하는 욕망, 보다 스타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관객과 그 자신의 이상과의 괴리가 정체성의 변화를 열망하게 만든다. 이것은 스타가 한 문화 내에서 여성적인 매력의 이상형을 구현하고, 역할 모델로 읽혀지며, 규범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관객과 스타라는 두 정체성들 간의 변화 가능성, 즈 관객에서 스타로 옮아갈 수 있는 가증성에 대한 환상을 나타낸다. 1

- ‘여성의 권력 속에 존재하는 쾌락’은  관객이 스타의 육체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닌 인격과 행동, 특히 힘과 자신감 그리고 저항에 의해서도 매료당함을 보여준다.

- ‘동일화와 도피주의’는 관객이 일시적이나마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스타가 속한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보여준다. 이는 자아와 이상 간의 경계가 상당히 유동적이라서, 관객의 정체성이 스타나 그녀가 표상하는 인물과 융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② 동일화 외부의 실천 : 영화를 보고난 후

- pretending(가장하기) : 게임임을 알면서 ~하는 척 하기

- resembling(비슷해지기) : 관객과 스타의 유사성 주장, 연결점 확보

- imitating(흉내내기) : 스타처럼 되기 위한 스스로를 변화시킴

- copying(본뜨기) : 스타의 외모를 그대로 따라 하기


(2) 인종과 성차의 결합

<칼라 퍼플>(스티븐 스필버그, 1986)은 페미니즘 정치학과 대중 영화가 주는 쾌락 간에 놓여진 긴장을 보여준다. <칼라 퍼플>은 평범한 여성의 관점에서 진행되며 해피 엔딩으로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여성 관객을 눈물 흘리게 만드는 동시에 아리스 워커의 원작인 갖고 있는 인종과 젠더에 대한 도전과 레즈비어니즘이라는 정치적 문제들을 탈색시킨다. 그 결과 이 영화는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해피 엔딩에 안심하게 만드는 ‘모순적인 관람 경험’을 만들어 낸다.

이 영화는 흑인 집단 안에서 다양하게 수용되었다. 흑인 남성은 싫어했지만, 흑인 여성은 좋아했다. 관객의 차이가 성차 말고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원작은 흑인 여성 작가가 썼고, 백인 남성인 스필버그가 감독하면서 많이 달라졌다. 흑인 남성은 악하게 그려졌고, 흑인 여성은 고난에 찬 성장 영화로 이해하게 되었다. 관습적으로 흑인 남성은 에디 머피처럼 코믹하고 희화화된, 범죄자이자 섹시한 이미지로 그려지고, 흑인 여성은 뚱뚱한 하녀, 또는 관능적인, 모자라거나 희화화되어서 표현되었다. 흑인 여성의 삶이 제대로 그려진 적이 없다. 토리 모리슨 같은 작가들이 흑인 여성들의 삶을 역사화하며 재현해 간다. <칼라 퍼플>은 흑인 여성들의 삶의 모순과 갈등을 담고 있다. 흑인 여성들의 역사가 그려진다. 어떤 맥락에서 이것이 가능했는가?


Ⅳ. 피학증과 텍스트 분석

- 피학증 : 소도구들은 권력을 상징하는데 권력은 본래 불편하다. 그러나 피학증은 이것을 쾌락으로 바꿔버린다. 페미니즘 비평은 여성이 당하는 위치에서 피학증을 강요받는다고 말하지만, 피학증적인 위치는 종종 특권적인 위치가 되며, 위치가 역전되어 도리어 더 주도적이 될 수도 있음을 주장한다.

포르트 다 게임이 본능적 불쾌를 문화적 쾌학으로 바꿔주는 설명 수단이 된다. 1차 과정이 감정적으로 강렬함 나타낸다면, 2차 과정은 감정적으로 감소하면서 언어적 시도를 하게 되고 본능을 우회적으로 만족시킨다. 이것이 피학증의 원리에 많이 이용된다. 불쾌한 경험을 부인하고 쾌락으로 변화시켜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피학증은 전 외디푸스 단계에 나타나는데, 거울상 단계에서 소외와 분리, 분열이 일어나며, 이것이 더 근본적인것이 된다. 반면 가학증의 원인은 외디푸스적이다. 피학증의 쾌학은 수동성과 종속의 쾌락이다. 결국 쾌락은 그 속에서 주체가 문화적으로 지배되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충동적으로 반복한다. 피학증은 열등하지도 않고, 여성 전유물도 아니며, 남성도 그 위치에 놓일 수 있다. 기존의 멜로가 여성의 비극에 초점이 있다면 이것이 뒤바뀐 상황에서는 ‘전치’를 통해 쾌락을 누린다.


1) http://www.drama21c.net/video/cinefeminism1.htm 씨네페미니즘을 정리한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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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  |  2008. 7. 25.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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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정 [영화 그리고 문화 연구] 서동진.


◇ 심미적 텍스트로서 영화와 영화학 film theory

- 정치적 모더니즘 혹은 기호학, 작가주의는 영화를 어떻게 영화의 ‘텍스트’를 발명했는가?

- 영화 이론의 담론적인 대상으로서 영화의 구성(텍스틀, 영화 담론, 숏과 프레임, 미장센, 편집과 데쿠파주의 특권화)

- 문학적 대상화 영화의 관계(서사로서의 영화, 장르로서의 영화 등, Untimely Text로서의 소설?)

- 사진적 대상과 영화의 관계(사진적 현실과 영화적 현실의 구분, 사진과 영화의 분화/자율화에 관한 신화들)

- 회화적 대상과 영화의 관계(시각적 쾌락과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영화, cf. 정신분석학적인 영화 이론들)


이 강의는 도식적 영화 평론에 대한 조롱과 비난이 될 것이다. 이전에 배운 영화 이론들에 대해 메타적 거리두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화 비평(criticism)을 하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이론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대상을 고정하고 규정하려는 노력이 집단화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를 텍스트나 work로 놓고 비평하는 일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평론가들도 영화 자체를 비평하지는 않는다. 이전의 영화 이론들은 억지가 많았다. 작가라는 개념을 탄생시키기 위해 감독만을 작가로 내세우고, 제작자나 여러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배제가 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감독만의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영화의 소비 방식도 변화되어 왔다. 소비 방식의 변화는 영화 평론의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어떤 종류의 영화를 즐기는가에 따라 그의 정체성도 달라진다. 자신이 본 영화에 대해 옹호하려는 것은 자기가 가진 취향을 옹호하려는 한 방식이 되었다.

고전적인 소비방식은 소위 영퀴방 방식으로 영화에 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소유했느냐가 중요했다. 스크린으로 시작해서 키노까지의 흐름이다. 여기에 영화 이론에 의지해서 영화를 보려하는 퇴행적이고 강박적이며 도착적인 태도가 있었다. 이것이 마치 영화보기의 유일한 방편인 것처럼 여겼지만, 그렇지 않다.


요즘에 들어 영화 이론의 위기라고 하는데, 아마도 고다르같은 사람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고다르 시대에는 영화를 작품으로 등극시키고 이것에 대해 분석하고 비평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방식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이미 우리 몸은 영화를 보는 것에 동조된 기계화된 보기를 하고 있다. 구스 반 산트의 <Jerry>에는 끝없이 뛰기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맷 데이먼이 나와서 사람이 많이 올 줄 알았는데....2명 와서 앉아서 코 골아서 실망했는데....이 영화는 2-30분 보다가 영화를 안 보고 듣게 된다.


네오 느와르, 포스트 느와르 영화들을 보면 기억의 정치학에 의존한다. 노스탤지어의 개념이 끌려 들어오는데, 그 때는 어떤 시대였는가 하는 것이다. 워커 에반스의 사진들을 보면 그 때의 장면들을 정확하게 재현한다.

영화에서 재현은 단순한 사실의 재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박하사탕>처럼 내면의 변화는 사운드 트랙의 사용에 의해서 나타난다. ‘나 어떻해’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은 그 시대의 기억을 담고 있다. 파탄해 가고 고문형사가 되어 순임이와 끝났음을 보여줄 때 ‘내일’이라는 노래는 존재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증명해 주는 방식이다. 옛날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인정해야 하는데,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노스탤지어의 방식으로 영화가 소비되는 것도 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서태지를 상기하는 것은 서태지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보는 것이다. 단서와 실마리로서 기호가 된다.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뿐이다. 영화가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것은 비평적 보기와는 거리가 멀다. 영화와 영화 외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적 모더니즘, 기호학, 작가주의는 영화에서 텍스트를 발명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작품인 텍스트에 한정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영화보기는 아니다.

사회적 실천으로써 영화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영화는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인 기억, 주체성들을 영화는 어떻게 전유하는가? 어떤 내용들이 영화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 영화주의는 영화를 심미적 대상으로 간주하려 한다. 문화 연구는 다른 대상으로 보려한다.


◇ 문화연구의 대상으로서 영화 그리고 영화연구 film studies

-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s)으로서 영화(cf. 그래엄 터너, <대중영화의 이해>)

- 영화를 구성하는 사회적 실천은 무엇인가

- 몇가지 예를 들자면

1) 극장, 멀티플렉스라는 근대적인 유흥 장소 vs. 백화점, 아케이드, 쇼핑몰....

2) 보드빌, 매직 쇼, 극장 구경, 관람... cf. 청취로서의 감상과 흥분된 몰입

3) 관객과 보는 이...cf. 스타(덤)와 역할, 연기의 자율성

4) 사회적 기록으로서의 영화, 문화유산...cf. UNESCO. archive, 나윤규 등

5) 문화적 정체성으로서의 영화... cf.  컬트, 퀴어, national cinema

6) 문화적 이벤트로서의 영화...  cf. 칸느, 부산, 베를린, 오스카....

7) 영화 상품... cf. 헐리우드, 발리우드, 충무로....

8) 지각으로서 영화... cf. human-machine system? 기계복제시대의 예술 작품? 도그마?


영화적 자각은 파노라마적 지각이라 할 수 있는데, 한 번에 훑어보는 능력이다. 철도 여행을 하는 동안 창밖의 많은 정보들을 보지만 그것을 다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것처럼 영화에서도 지각에 있어 어떤 능력이 발달해야 한다. 20세기 초에 여자들은 집단적으로 광장 공포증을 일으켰는데, 집 안에만 머물던 여자들이 광장에 나가면서 시선들을 처리하기가 힘들었다. 지각 체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여성들에게 있어 공적인 시각들을 처리할 수 있는 지각 체계에 한계가 있었다. 영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파노라마적 자각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의 변화가 있어왔다.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 같은 책은 영화의 지각 방법이 전쟁의 변화와 같이 변화되었다고 본다. 전쟁의 변화가 영화 상영과 제작의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온다. 이를테면, 디지털 영화의 전국 배급을 보잉이 만든다는 것이다. 왜 보잉이 영화 배급을 하지?


스타덤의 경우 역시 영화 텍스트와 상관없으며, 스타는 캐릭터와 역시 상관이 없다. 스타 캐스팅은 영화를 구성하는 문화적 제도 중의 하나이다. 스타는 텍스트와 독립되어 있다.

배우들의 연기의 자율성은 이 스타성에 의해 제약되기도 한다. 양조위는 더 이상 다른 배역이 아니라 양조위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 배우들이 나이를 먹게 되면 더욱 더 제약 받거나, 아니면 이상하고 웃긴 방식으로 희화화 되어야 한다. 영화의 배역으로 환원되지 못하는, 한 텍스트의 구성 요소로 돌아가지 못하는 스타의 특징이 있다.

또한 왜 영화관은 멀티플렉스화되고 쇼핑몰과 결합할까?


보드빌이나 매직 쇼, 극장 구경과 음악 듣기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흥분된 몰입과 청취자로서 감상의 차이가 있다.

사회적 기록으로서 영화, 문화유산으로서 영화로 인식의 변화가 있어왔다. 유네스코는 이제 영화를 문화유산으로 인식한다.

소위 national cinema라 불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영화를 역시 문화적 현상으로써 파악하는 것이다. 로테르담 영화제나 부산영화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national cinema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것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회고전의 경우 작가의 전기적 소개로써 영화 세계의 변화의 내용들을 보여줌으로써 영화 자체를 해석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임권택에 대한 정성일의 역할은 무엇일까? 임권택의 작품의 역사를 연구해서 한 감독-저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든 평론가들은 이런 글들을 쓰고 싶어 한다.

영화 상영의 포맷도 변화하고 있는데, 작가의 회고전에서 주제 중심으로 옮아가고 있다.


◇ 다시 영화 이론으로? - 문화 연구와 영화의 새로운 관계

미학적 텍스트 / 사회적 실천

영화와 영화 제도, 정책, 산업


영화 비판으로서 영화? (cf. Godard, Debord?)

지각(perception)의 계급 투쟁? (cf, Eisenstein, Vertov?)

문화 산업 비판? (cf. Adorno?)


다음 주에는 퀴어 영화에 대해....

토드 헤인저의 ‘벨벳 골드마인’과 ‘파 프롬 헤븐’정도 보고 오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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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映像의 울림  |  2008. 7. 25.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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